“이 땅에 처음 교회 세웠던 믿음의 선배들 기억해야”
순천제일교회와 아버지 김종하 장로는 유일한 내 자부심
영등포노회 발산동교회 부지는 서울노회 유지재단에 가입된 법인의 기본재산이다. 교회 재산의 사유화를 막고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교회는 유지재단에 가입할 수 있다. 발산동교회 김영수 장로는 2003년 교회 부지를 서울노회 유지재단에 가입시켰다.
“장로 장립받은 은성교회 땅도 내가 유지재단에 가입시켰어요. 은성교회 관련 사건이 15건이 있었어요. 몇 달을 싸웠지. 조폭이 동원되기도 하고… 큰일입니다. 큰일이에요. 어렵게 세운 교회인데 돈 때문에 교회가 망가졌어요.”
김영수 장로는 은성교회 시무 당시 사건 몇 가지를 밝혔다.
“목사님이 어느 날 북한 선교를 해야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에 잉여 물자가 많이 있는데 수송비가 없어서 북한에 전달을 못하고 있다며 3억 원을 헌금해서 북한에 그 물자들을 갖다 주자고 했어요. 당회에서 결의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3억 원이 북한에 간 게 아니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간 겁니다. 또 한 번은 미국 시카고에 교회 개척을 하자고 제안하더라고. 교회 개척 좋지요. 한 달에 3천불을 보내자고 했고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서 보니 미국 시카고에 우리가 개척한 교회가 없는 거예요. 그곳에 살고 있는 목사님의 가족에게 돈이 계속 가고 있었더라고. 이런 사건들이 15건이나 됩니다. 제가 재정부장을 맡고 있을 때 교회 장부를 들여다보니 도저히 나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앞뒤도 맞지 않고 관련 서류는 없고.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 몇 달 동안 이어졌지요. 조폭을 동원해 주일예배를 드리러 간 나를 비롯한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기도 했어요. 그래서 결국 교회를 떠났어요. 그렇게 시작된 교회가 하나교회입니다.”
은성교회를 나온 김영수 장로와 300여 교인들은 인근 한 건물에 새 예배당을 마련했다. 보증금 3천만 원에 월세 320만 원, 1998년 2월 8일 하나교회라 이름을 짓고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 교회를 향한 기대는 얼마 안가 무너졌다.
“1998년 9월 목사님이 부임하셨어요. 그리고 2000년 8월 목사님께서 미국 친지를 방문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3주간 식구들과 함께 미국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당회에 보고하셨고 그렇게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저를 따로 불러 하시는 말씀이 미국 교회에 가게 됐다면서 교인들에게는 함구해 달라 부탁하셨어요. 휴가가 아니라 미국에서 부임하기로 한 교회를 방문하러 간다는 겁니다. 저는 함구했지요. 그런데 그달 말 돌아오신 목사님 말씀이 사모님이 미국에 안가겠다고 했다며 일주일 동안 기도하고 결정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막상 가보니 그 미국 교회가 소속 교단도 없고 30여 명밖에 안 모이는 교회였던 겁니다.”
부지 마련 협조해준
정병택 장로에게 감사
김영수 장로는 하나교회를 세우고 교회 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마땅한 땅을 찾았고 김 장로는 당장 일에 착수했다.
“현재 이곳 발산동교회 부지를 산 게 당시 하나교회가 있던 2000년 8월 16일입니다. 알아보니 화곡동치유하는교회 정병택 장로님 땅이라고 하더라고. 당장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땅 못 사면 장로 그만둬야지, 장로 자격이 없지 싶을 정도로 좋은 땅이었어요. 총 505평에 25억 원이었어요. 정 장로님께 의사를 전하니 장로님 회사 직원들이 하나교회는 돈이 없는 교회라고, 계약하면 돈을 받지 못할 거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 제 소유 건물을 담보로 하겠다고 했지요. 우여곡절 끝에 정 장로님께 그 땅을 20억5천만 원에 샀습니다. 정 장로님께는 지금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직원들의 반대에도 그 땅을 하나교회에 팔아주셨고, 감액도 해주시고, 더욱이 계약 후 잔금처리를 1년 뒤로 협조해 주셨어요. 덕분에 하나교회 장로들이 1년 동안 헌금을 작정하고 부지 대금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후 새로운 갈등이 시작됐다. 미국에서 돌아온 목사는 자신의 부재중 체결된 부지 계약을 불쾌하게 여겼다.
“하나교회는 한 지붕 아래 두 집 살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둘로 나뉘어 한 장소에서 따로 예배드렸어요. 목사님 측이 주일 오전 10시에 예배드리고 나면 나머지 교인들이 11시에 예배 드렸는데, 그러면 그 좁은 복도에서 둘로 갈라진 교인들이 충돌하고 싸우곤 했어요. 결국 목사님은 교인 180명의 서명을 받아 나가 근처에 교회를 새로 세웠어요. 나가면서 교회 부지의 60%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유지재단에 가입됐기 때문에 불가능했지요. 이후 발산동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온 겁니다.”
“헌금 절대로 허투루 쓰지 말라”
원칙대로, 아버지께 배운 것
김영수 장로는 이처럼 타협하지 않는 자신의 성정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난 원칙대로 하는 것뿐이에요. 아버지께 내가 배운 것은 헌금을 절대 허투루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못된 짓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솔직히 이렇게 기사가 나가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운데. 마치 자랑하는 것이 될까봐. 내가 자랑할 것은 교회와 우리 아버지밖에 없어요.”
김영수 장로의 부친은 고(故) 김종하 장로. 순천제일교회 창립자 중 하나다. 1936년 창립된 순천제일교회 75년사에는 ‘당회장 최병준 목사, 교역자 나덕환 전도사, 교회직원 김종하 집사가 교회를 시작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나덕환 전도사는 나중에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목사 안수를 받는데, 교단 총회장(46대)이 된다. 85대 총회장 박정식 목사도 순천제일교회 출신이다.
고 김종하 장로는 순천매산학교를 설립, 매산학원 이사장을 지냈고, 순천노회 장로노회장을 두 차례(42대, 53대) 역임, 초대 순천노회장로회장, 순천노회 유지재단 이사장, 호남기독학원 이사장 등을 맡아 순천지역 복음화와 기독교 교육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우리 아버지가 법원, 옛날엔 재판소라고 했어요. 재판소에서 근무하시다가 나와서 대서사무소를 차리셨어요. 지금은 법무사라고 하는데 옛날엔 대서사무소였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많아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어요.”
이기풍 목사의 딸 이사례 여사가 쓴 책에 보면 김종하 장로에 관한 일화가 나오는데, 이기풍 목사가 여수경찰서에 수감되자 이사례 여사가 김종하 장로를 찾아와 ‘아버지께 드릴 따뜻한 솜바지 저고리 한 벌만 빌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 장로는 쏜살같이 안방으로 들어가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명주 바지와 저고리를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순천제일교회 출신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아버님도 계시지만,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드님도 순천제일교회 출신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큰형님하고 함께 기독학생 활동을 했어요. 또 자랑하고 싶은 건 순천제일교회에서 총회장이 두 분이나 나왔다는 겁니다. 시골 교회에서 총회장을 두 분이나 배출한 건 대단한 일이지요. 장로님들이 그만큼 협조했다는 거고. 그때는 정말 모두 교회를 위해서만 열심히 일할 때였으니까. 사리사욕 버리고. 목사, 장로 모두 순수하게 교회를 위해서만 일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만큼 발전한 거라고 생각해요.”
김영수 장로의 조모 정광화 권찰은 전도왕으로 불렸단다. 증조부는 고을 사또였는데 당시 순천 지방에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사역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김영수 장로는 6남2녀 중 5째 아들이다. 형제들 중 장로가 8명, 권사가 6명, 선교사가 1명, 집사가 1명이다. 부인 최현순 권사 집안 역시 5대째 신앙 유산을 이어가고 있는 기독교 명문 집안이다.
“아내는 순천중앙교회 출신이에요.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부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지도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어요. 선교사, 신학생들 도와주는 걸 아주 좋아해요.”
슬하에는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은 김영수 장로처럼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김 장로의 사업을 이어받았고, 둘째아들도 김영수 장로의 재능을 물려받아 성악을 전공해 파주 오페라단 부단장으로 활동한다. 김영수 장로는 현재 전국 장로성가합창단 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학교를 다녀 매일 예배 드리며 찬송을 불렀고 고등학교에서는 합창단 활동, 교회에서는 성가단 활동을 쭉 해왔다. 아버지의 음성도 좋았는데 형제들이 모두 다 노래를 잘 불러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찬송소리가 무척 아름다웠다고. 김영수 장로는 자랄 때는 몰랐지만 장성해 지난날을 돌아보니 콩나물이 물을 먹고 자라듯 신앙심도 부지불식간에 자라는 거 같다며,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듣는다 할지라도 신앙은 자란다. 어려서 학교와 교회에서 또 가정에서 매일 예배드리는 생활을 했던 것이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 큰 유산이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영수 장로에게 한국교회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있어요. ‘녹명.’ 사슴 녹(鹿), 울 명(鳴)이예요. 중국에 나오는 말인데, 보통 사람이나 짐승들은 먹을 것이 생기면 자기부터 먹는데, 사슴은 먹이를 찾으면 운다고 해요. 먹이를 구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여기 먹이가 있으니 이리 오너라 하고. 저는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녹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혼자 차지하려고 하지 말고 자리다툼하지 말고 함께 살자, 함께 가자, 함께 하자. 순천제일교회와 같이 이 땅에 처음 세운 교회, 그 교회를 세우셨던 목사님, 장로님, 믿음의 선배들을 다시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한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