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향기] 재호주 솔리데오 합창단 단장 유준웅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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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고난 딛고 이민사회에서 성공 …교회와 학교 세우는 데 헌신

브라질과 호주 이민 1세대 유준웅 장로, “어머님 기도로 살아온 평생”

1971년 한국을 떠난 유준웅 장로는 지난 5월 열린 세계교민청대회에 참석하고자 고국을 찾았다. 고국이라고는 하지만 만주에서 태어나 북한, 북한에서 남한, 한국에서 브라질, 브라질에서 호주로 이동하며 살았던 유준웅 장로 인생에서 진정한 고국은 오직 ‘하나님 나라’뿐일지도 모르겠다.
유준웅 장로는 만주 벌판 한가운데 자리한 중국 사평에서 태어났다. 유 장로의 아버지는 일제의 만행을 피해 고향 황해도를 떠나 만주에 이르렀고 벽돌공장을 운영하면서 독립군을 도우며 당시 그곳의 유일한 교회였던 봉천 서탑교회에 다니던 중 결혼해 7남매를 낳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 황해도 사리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25전쟁과 함께 다시 이남으로 내려온다.
“아버지는 교회 장로셨는데, 만주에서 한창 때는 벽돌 공장을 열두 곳 운영하시며 수백 일꾼을 거느린 대사업가였습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해요. 훗날 내가 고국과 타국을 오가며 파국과 난국을 미친듯이 헤쳐 나갔던 힘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 같습니다.”
유 장로는 만주에서 불발탄을 가지고 놀다가 왼쪽 팔을 잃었고, 이북에서는 아버지를 잃었다.
“내가 6살 때, 중국인 일꾼이 갖고 있던 폭탄을, 장난감이랄 것이 없던 당시에는 그 폭탄이 예쁘게 생겨 보였어요. 그걸로 장난하다 이렇게 손을 잃은 거야. 왼손을. 내가 원래 왼손잡이에요. 우리 아버님은 나에 대해 늘 기도하시기를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는 교육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
유 장로는 서른다섯 이른 나이에 미망인이 된 어머니, 그리고 남은 형제들과 함께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유 장로는 인민학교 5학년. 월남해보니 남한은 초등학교가 6년제였다. 다시 초등학교에 들어가 학업을 마치고 대광중고등학교를 졸업, 195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유 장로는 학교를 세웠다.
“대학교 2학년 때 천호동에 중학교를 세웠어요. 그게 그때는 천호고등공민학교였지요. 나중에는 천호상업고등학교가 되고 위례상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서울외국어고등학교도 설립했지. 그렇게 학교를 세웠던 건 어려서 품었던 생각도 있었고, 내가 제일 감명깊게 보았던 영화가 ‘상록수’예요. 나도 저런 교육사업을 해야 되겠다 하고 시작한 것이 천호고등공민학교였어요.”
처음 한국을 떠나려던 계획도 교육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브라질에 있는 한국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교민학교를 세워보자 해서 몇몇 사람들이 뭉쳐서 얘기가 됐어요. 그래서 브라질로 나갔던 겁니다. 한국인 학교를 세우려고. 그런데 막상 브라질에 가보니까 얘기했던 거랑 현지 상황도 너무 다르고 교민 몇 명으로는 학교를 세울 수가 없었어요. 맨 처음 우리가 브라질에 갔을 때는 교민이 1만 명도 안됐어요. 누가 누구인지 다 알 정도로. 브라질로 이민을 갔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1968년도에 김신조가 들어왔어요. 국군이 철통같이 지킨다고 하는데 김신조와 종로 바닥에서 총격을 벌일 정도라니 불안하더라고. 특히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넘어와 더욱 불안했지. 그러다 1969년부터 우리나라에 이민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학교 운영은 친구에게 맡기고 1971년 가족들을 데리고 브라질로 떠났던 겁니다. 어머니와 아들 셋, 누님과 여동생 가족들 다 함께 18명이 한 비행기를 타고 사흘 걸려 브라질에 도착했어요.”

브라질에서 다시 호주로

유준웅 장로가 막상 브라질에 도착해 보니 교민학교를 세울 형편이 전혀 못됐다. 온 식구들을 끌고 브라질까지 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던 유 장로는 장사를 시작했다.
“그땐 동양인은 무조건 일본인인 줄 알았어요. 내게도 재패니즈라고 불렀어요. 학교 선생하던 사람이니 제가 장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 않았겠어요. 맨 처음에는 세일즈부터 했어요. 남의 가게에서 물건을 받아다 가게마다 돌아다니면서 파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의외로 그것이 잘 팔렸어요. 말도 안 통하니 숫자만 써서 손짓발짓하면서 팔았는데 3개월 만에 상파울루에 있는 큰 점포만 300개를 잡았어요. 그리곤 그 사람들이 나더러 내가 떼어오는 물건들이 잘 나가니까 직접 만들어오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세일즈를 하다가 제품 제작 일을 하려니 또 뭘 알아야지. 제품 제작 일도 전혀 모르는 데다 내가 바느질을 아나, 원단을 아나. 처음에는 원단의 앞뒤도 몰랐어요. 우리 집사람보고 어느 면이 바른 면인지 물으니 무조건 고운 쪽이 바른 면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 눈에 고운 쪽을 바른 면이라 생각하고 재단했는데 나중에 보니 다 뒤집어 잘라놓았던 거예요. 내가 한국에서 학교 교장을 하다가 이민온 줄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서 우리집은 ‘유 교장 집’이라고 불렀는데, 바느질집에서 “유 교장 집 망하겠다. 원단 앞뒤를 다 뒤집어 잘라 갖고 왔다”며 걱정했어요.”
유준웅 장로는 제품 반품 요구가 폭주할까봐 한동안 전화 수화기도 내려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다.
“수화기를 바로 놓으니 곧바로 전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우리 제품이 금방 다 팔렸으니 얼른 더 갖다 달라는 주문전화였어요. 그때부터 우리가 만든 블라우스가 하루에 몇 만 장씩 나가고 나중엔 공장까지 지었지요. 돈을 정말 많이 벌었어요. 벌었다기보다 긁어모았다고 하는 게 맞지요. 우리 어머님께서 신앙심이 대단하신 분이신데 십일조를 아주 철저하게 하셨거든. 처음에는 돈을 드리면 어머님이 돈을 세서 십일조를 떼어놓으셨는데 나중엔 ‘돈 세다가 병나겠다’시면서 돈 세기를 포기하시고 그냥 돈 박스 하나를 교회에 들고 가셔서 헌금하셨을 정도였으니까. 아마 어머님 덕분에 우리가 그만큼 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지금도 생각해요.”
이후 호주로 거처를 옮긴 것도 어머니 때문이었다. 브라질은 당시 치안이 불안정했다. 사고로 다치고 목숨까지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녀들이 학교에 나가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자손들 걱정에 매일 기도하시던 어머니께선 어느 날 호주로 가자고 하셨다.
“당시엔 호주는 백호주의 정책으로 유색 인종 이민을 배척하던 때였는데 어머님께선 어떻게 호주를 아시고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관광비자 받기도 정말 힘들 때였는데 감사하게도 가족들이 호주 구경을 다녀왔어요. 브라질에 살다가 호주에 가니까 그곳은 마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지상낙원 같더라고요. 그래서 호주로 이민을 계획하게 됐지요. 어머님 기도 덕분에 브라질에서 그래도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됐는데 또 어머님 덕분에 호주로 이민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유준웅 장로는 동산유지 호주 지사장으로 발령받아 호주로 이민을 갔다. 호주에서 많이 나는 소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어 한국에 팔았다. 나중엔 ‘쌀 토스트’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 사업도 크게 성공했다. 중간에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유 장로는 “우리 가족에겐 부지런한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이민 1세의 성공사례가 됐다. 피난시절부터 내려온 우리 가족의 큰 무기이자 낯설고 새로운 곳에서의 개척정신이었다. 부지런하지 못하면 운도 따르지 않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신조였다”고 말했다.
유준웅 장로는 집안에서 4대째 기독교 신앙인이었고, 어린 시절 황해도 사리원에서 살 때는 ‘전도왕’으로 불렸다. 피난을 내려와 마산중앙교회를 나가다가 중학생 시절 동일교회(현 충현교회의 전신)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브라질에서는 중앙성결교회에 출석했다. 유 장로는 브라질을 떠날 때 상파울로에서도 손꼽히는 좋은 주택가에 교회 부지를 마련했다.
“아버님도 장로님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지만 우리 어머님께선 일주일 중 나흘은 철야기도를 하시며 교회에서 주무셨어요. 서른다섯 살에 혼자 되셔서 육남매를 데리고 38선을 넘으셨던 어머님은 평생 하나님께 완전히 매달려 산 분이세요. 교회 옆이 아니면 집을 얻지 못하게 하셨어요. 교회에 가서 주무셔야 하니까. 지난 내 평생은 내 신앙이 아니라 어머님 기도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유준웅 장로는 호주에서도 브라질에서처럼 행복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상황은 달랐다. 호주 교회는 우후죽순으로 갈라지고 서로 시기하고 원수가 돼 있었다. 유 장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것보다는 그의 오랜 소망이고 꿈인 교육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하여 1992년 시드니에 랭귀지 스쿨 ‘Australian Pacific College’를 설립했고, 지금은 학교가 성장 발전해 10개교에 300여 교사, 5000명 규모의 큰 학교로 성장했다.
“교회에는 일부 사람들만 나오는데, 교육기관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호주인, 다른 외국인들 모두 다 오잖아요. 종교가 달라도 배우기 위해서 모두 몰려 와요.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에 보람을 크게 느껴요.”
유 장로는 교육사업을 하면서 부인 송홍자 권사를 만났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송 권사는 결혼 50주년이었을 때 ‘엄마의 바다’라는 책을 펴냈는데, 해방과 6.25를 겪고 이민 1세대로 살아가며 겪은 애환을 담아낸 삶의 기록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유 장로와 송 권사는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고, 모두 각자 자리에서 성실히 신앙생활하며 미국과 호주에서 산다. 특히 막내 아들은 유 장로의 교육사업을 물려받아 오스트레일리안 퍼시픽 칼리지 이사장으로 학교 운영을 맡고 있다.
오랜 이민생활을 해온 유 장로에게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내가 이북에서부터 쫓기고 학대받으면서 믿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브라질에서도 호주에서도 우리 가족의 중심은 하나님, 교회 중심이었어요. 난 도리어 한국교회를 향해 묻고 싶어요. 이렇게 많은 교단이 필요한가요? 교단이 생기는 건 좋은데 사실 교단마다 그 교리라는 것들이 다 자기 주장이지 하나님 주장이 아니지 않나요? 성경으로 하나가 되어야지 않나요? 내가 목사 안수도 받았지만 목사라고 안하고 장로라고 밝히는 이유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모두 다 장로이기 때문이에요. 목회하다가 은퇴하면 장로가 되는 거 아닌가요? 목사라고 한다면 옛날 목사님들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를 하고 목회해야 하지 않나요? 돈 더 많이 주는 교회로 옮기고 마음 틀어지면 나가 따로 교회 세우고, 그게 무슨 신앙생활인가요. 우리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그런 신앙이 한국교회에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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