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걷다보면 가창면 삼산리가 나타난다. 삼산리에 가면 삼산교회가 있다. 작은 시골교회이지만, 아담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세워진 교회이다. 그런데 한적한 그 골짜기에도 이젠 집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이고 활기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이른 아침에 청도군 이서면 칠곡리를 출발해 팔조령을 넘어 가창 삼산리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많이 피곤했다. 삼산교회에 도착한 후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기도한 후 담임목사님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옛날 예배당이었다. 새로이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옛날 예배당을 교육관 겸 소예배실로 사용한다. 목사님은 그런 곳을 잠자리로 제공함을 미안해 하지만, 이런 잠자리를 제공받는 것만으로도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렇다. 이런 잠자리를 제공받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가창삼산교회 이진우 목사님은 장로교 합동측에 속한 교회에서 목회하지만,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해주어 감사했다. 혼자 순례를 하게 되면 그런 편의를 제공받는 일이 쉽지 않다. 혼자일 때는 그런 것을 문의하는 것도 쉽지 않아 혼자 값싼 여관을 찾아가서 숙박을 한다. 그런데 순례단을 만들어 출발하는 경우는 순례단에 속한 각자의 처지가 달라 경제적인 여건이 충족되지 않아 순례에 참석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큰 교회에 후원을 얻어 많은 사람이 순례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는 않다. 순례단 5명이 함께 가창삼산교회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계획되어 장소를 허락받았는데, 다른 4명은 급한 일정이 생겨 청도에서부터 대구까지는 혼자 순례를 하게 되어 그날 가창삼산교회로 혼자 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 밤에도 청도 칠곡교회에서처럼 홀로 가창삼산교회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 4월 22일에 가창삼산교회에서 대구제일교회의 옛날 예배당인 대구기독교역사관까지 가는 길은 대구제일교회의 국내선교부 부장인 배재호 장로가 국내선교부원들과 함께 참여했다. 가창삼산교회에서 대구제일교회의 옛날 예배당까지 가는 길은 평탄하고 걷기에 좋은 길이다. 가창에서 대구로 가는 도로가 직선으로 뻗었고 거의 20여km 정도 된다. 그런데 필자는 직선으로 뻗은 큰 도로의 갓길로 걷지 않고 돌고 도는 길이라도 걷기에 더 아늑한 길을 선택해 걸었다. 그렇게 걷는다해도 30여km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가능하면 평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신천의 물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지금은 신천을 따라 대구로 내려오는 길이 거의 다 정비되어 있지만 배위량 길을 순례를 시작했던 2015년부터 처음 몇 해 동안은 신천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정비된 곳도 있었지만, 정비되지 않은 구간도 많아, 자주 끊어져 돌고 또 돌아야 했다. 신천의 길이 끊어질 때는 신작로 길을 걷다가 신천 길이 정비되어 신천을 따라 내려올 수 있을 때는 길을 돌고 돌아서라도 신천 길을 따라 걸어가는 노정을 선택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걷다보면 신천의 상동교에 이르게 되고 상동교부터는 대구시에서 진작부터 만들어둔 산책로가 신천을 따라 놓여져 있어 많은 시민들이 그 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고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신천을 따라 내려오다 수성교를 지나서부터는 시냇길로 들어 온다. 반월당에서부터는 옛길인 영남대로의 길을 따라 대구제일교회의 옛날 예배당으로 가게 된다. 그 길은 대구시 중구에서 관광자원화해 여러 가지 볼거리를 제공하는 길이다. 영남대로를 이렇게 복원해 대구를 방문한 나그네들이 그 길을 걸을 때 다른 볼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준비해준 여러 관계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대구는 영남대로상의 거점 도시로 옛부터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
6.25전쟁 당시에 대구는 지정학적인 영향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군과 대구 근교 가산 인근에서 북한군과 유엔군과 국군이 대치하며 공방을 거듭한 끝에 대구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그 당시에 낙동강 동쪽 땅 중에서도 대구 아래만 국군이 관활하고 나머지 모든 지역이 북한군의 통치 아래에 속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이 다부동 전투를 위시한 대구인근의 여러 전투를 통해 백척간두의 조국의 운명을 지킨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대구의 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백척간두의 조국을 지켰다. 만약 6.25전쟁 당시에 대구를 빼앗겼다면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못했을 것이고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부산까지 밀고 내려갔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구는 영광스러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구는 6.25때 참화를 당하지 않은 대도시이기에 고대, 근대, 현대 건축을 함께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도 알려져 건축사학을 연구하는 건축가들에게 중요한 지역이다.
대구는 이상화 시인같은 민족시인의 고향이고, 음악가 박태준과 미술가 이인성 그리고 고종 44년인 1907년에 전개된 국채보상(國債報償) 운동의 주역인 대구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의 고향이기도 하다. 국채보상운동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일본에 예속되지 않기 위해 온 국민이 동참한 국권 회복 운동이었다. 이런 저런 볼거리를 많이 가진 대구는 이러한 볼거리를 관광자원으로 삼아 ‘대구 근대골목’이란 관광상품을 개발했는데, 대구 근대골목 관광은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었다. 대구 근대골목 관광은 5개의 골목 관광 코스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골목길을 중심으로 형성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대구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제 2코스가 가장 인기가 있다. 제 2코스는 약 2시간이 소요되는데, 아래의 코스로 약 1.64km의 거리를 걷게 된다.
동산청라언덕 → 대구제일교회 → 3.1만세운동길 → 계산성당 → 이상화, 서상돈 고택 → 뽕나무골목(두사충) → 에코한방웰빙체험관 → 구 대구제일교회 → 약령시 한의약박물관 → 영남대로 → 종로 → 진골목 → 화교협회(화교소학교)
1896년 1월 배위량은 대구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기 위해 217달러 76센트(약 25만 원)를 주고 대구에 가옥을 구입한 후 부산에서 가족을 데리고 와서 대구에 정착했다. 그런데 배위량의 그 집이 대구제일교회 제1예배당이 되었고 그의 집에서 대구경북 최초의 교회와 병원과 최초의 학교가 창립되었다. 대구 3.1운동 길을 올라가면 선교사들의 두 번째 터전이었던 동산이 있고 그 동산 언덕 한편에 대구 선교 초기에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다. 배위량은 1931년 평양에서 운명을 달리했고 그는 앞서 하나님 품에 안긴 첫 번째 아내 애니 베어드의 묘(평양 장산묘지) 옆에 안식했다. 지금은 배위량의 무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울 양화진에는 배위량의 후손들과 제자들이 배위량 부부의 무덤을 평양에 남겨 두고 내려온 것을 안타까워해 1959년에 세운 배위량의 기념비가 있다.
배위량의 선교기념비에는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that loved us.”(“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는 성경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대구와 경북의 선교를 위해 배위량의 후임 선교사들이 크나큰 공헌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선교의 기초를 세운 이는 배위량이다. 그의 선교적인 헌신을 생각해 대구 동산 선교사 묘지에 배위량의 선교기념비라도 세울 수 있다면 배위량의 후임선교사들을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배위량이 부산과 대구에서 세운 선교 원칙은 배위량의 후임으로 대구로 부임한 선교사들의 선교 원칙이 되었고 미국북장로교회 한국 선교 원칙이기도 했기에 그렇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