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35) 배위량 순례단의 역사(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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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독일에서 1년간의 연구년을 보내고 2015년 8월 말에 한국에 들어와서부터 배위량이 제 2차 순회전도여행길을 탐방하고 순례하고 그 중심되는 도시의 교회를 방문하고  순회전도 여행 노정을 찾고 그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마주친 교회를 방문하거나 길에서 만나는 분들은 왜 그토록 머나먼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질문했다. 그때 그분들에게 필자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신학지식의 범주 내에서 이야기했다. 그럴 때 그 분들은 필자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많은 질문을 했다. 순례 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 배위량 순례길의 의미와 순례의 당위성을 말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배위량이 누구인가? 목회로 바쁜데, 왜 그런 일을 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사실 필자도 신학교에서 한국교회사 시간에 배위량에 대해서 배웠지만, 이름정도만 기억할 정도였기에 배위량에 대한 언급이 부족했다. 토마스,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마펫 등에 대해서는 신학을 공부한 대개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교회사에서 그만큼 중요시되어 왔고 더 많은 분량을 공부해야 된다는 인식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배위량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이다.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은 그를 기억을 할지라도 그는 한국 최초의 근대 대학인 숭실대학을 창립한 사람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필자는 배위량 순회전도 여행길을 찾고 그 길을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은 순례길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작정 걷기만 해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가 접한 목회자들과 평신도 대표들의 “배위량은 누구인가?” “왜 이 배위량 길을 순례해야 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배위량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니 우선 배위량에 대해 알기 위해 배위량에 대한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필자에게 질문했던 분들에게 필자가 말하기 보다는 배위량에 대한 전문가를 찾아 그 전문가들이 배위량을 더 연구해 배위량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배위량에 대해 알아 갈수록 그가 한국교회를 위해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개화기의 조선말에 한국에 들어와 어려움 속에서 선교를 감행한 것은 기억해야 할 당위성이 있었고, 그가 한국 선교를 위해 행한 일들은 한국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는 귀중한 자양분이 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위량 순회전도여행길을 순례하면서 배위량에 관한 연구 이력이 있는 교회사 학자나 선교 학자 등의 학자를 찾아 배위량에 대해 연구 논문을 발표하도록 위탁을 하고 순례를 하는 노정의 교회와 학교에서 <길위의 배위량 학술대회>를 준비했다. 논문을 발표하는 분들에게 소정의 원고료라도 드려야 하고 자료집도 발간해야 하고 다과도 준비해야 한다. 하늘의 일에는 믿음으로 하면 되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가령 <길위의 배위량 학술대회>를 준비한다 해도 학술대회에서 배위량을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연구자들에게 소정의 원고료라도 드려야 학자들은 그 일의 중요성과 그 일에 보람을 느낀다. 그것을 모르는 분들은 “너희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학자들에게 원고료를 지불하고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의아해 한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아무런 댓가 없이 어떤 일을 행할 수 있겠지만,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을 사모하고 살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은 세상의 것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잠도 자야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차도 타야 하고 물도 마셔야 한다. 그런데 그런 모든 일은 각자에게 노동의 가치를 알게 한다. 노동은 땅을 파는 일만 노동이 아니다. 학자는 연구하고 글을 쓰는 것이 노동이다. 요한복음 5:17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예수의 일은 땅을 파는 일이 아니었다. 복음 전하는 일이었다. 전도자는 전도하는 것이 일이고 노동이다. 학자는 공부하고 글쓰고 연구하는 것이 일이고 노동이다. 농부는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것이 일이고 노동이다. 이 일은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이다. 일을 한다면 정당한 가치의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 세상이다. 디모데전서 5:18에서 바울은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했다. 땅파는 사람에게는 땅파는 것이 노동이니, 그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런데 학자에게 글쓰는 것은 취미고 특기이니, 무료로 봉사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일이 된다. 글쓰는 학자도 땅파는 사람처럼, 그 삯을 받는 것이 공평한 것이 아닌가? 학자는 한 편의 논문을 쓰려고 할 때 그것을 구상하고 연구하고 글을 쓴다. 사람들은 그 일을 금방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꼬박 노력해야 한 편의 새로운 논문이 나온다. 연구시간으로 일 년을 주어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자들의 그런 고초를 알기에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수준으로는 대가를 표해야 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위한 수고의 대가, 참가자들을 위한 자료집 발간, 참가자 간식비, 식비, 준비위원회로 모여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니 회의비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비용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바다에서 낚시로 낚을 수도 없고, 땅을 파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일을 위해 수익 사업을 동시에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연구가 아니라, 사업이 되니 주객이 전도된다. 이 일을 위해 배위량 순례단 연합회에서는 회원들의 회비와 참가자들의 참가비와 가까운 친지들을 통한 모금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학회의 회원들이 형편이 넉넉해 회비를 많이 낸다든지 임원들이 모금을 잘해 재정이 넉넉하다면 문제가 없지만, 거의 모든 학술대회는 참석자에게 참가비를 받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나, 학자들도 세상에 살아가기에 동창회비, 무슨 무슨 학회비 등 회비내는 곳이 많다. 그러니 회비로 지출하는 액수가 많아 다시 어떤 곳에 회비를 지출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 그래도 학자들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학회에 소속하면 연회비를 내고 참석한다. 어떤 학술대회는 재정이 넉넉해 참가비를 받지 않고, 많이 모이는 데 목표를 두고 그런 취지로 운영하지만, 많은 경우 참가비를 내고 학술대회를 참가하도록 한다. 

대개의 학술대회에서 연회비를 내는 학회원에게는 참가비가 면제되지만, 단순 참가자들은 참가비를 받는다. 학자들은 학회활동을 해 왔기에 그런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학술대회에 참가비를 내고 참석하는 일이 생소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색해하는 참가자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목회자들에게는 학술대회에 참가하고 참가비를 내는 것이 생소하다. 와준 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아야지 돈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런데서 오해가 생기는 것 같다. 돈벌이를 위해 학술대회를 하면서 사람을 오라가라 하고 돈을 받는다고 비판한다. 그런 비판 속에서도 학술대회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참가비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턱없이 모자란다. 참가비로 충당이 되지 않으니, 모금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 왔던 대로 이번에 <제 5회 길위의 배위량 학술대회>를 안동 서부교회에서 행할 때도 그 교회에 학술대회 행사지원비를 요청해 지원을 받았다. 이렇게 행사를 하는 기관에서 장소도 제공받고 지원 액수가 크든 적든 지원을 받는 일은 대단히 쉽지 않는 경우이다. 행사를 위한 장소만, 또는 장소와 간식 제공까지는, 또는 장소 사용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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