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을 쌓아야 할 아이들이 ‘왕따’와 ‘학폭’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뒤틀려버린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청소년 폭력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청소년의 아픔이 극에 달했다는 말이다. 사회는 비행 청소년, 나쁜 아이라 낙인찍지만, 그 이전에 그들은 아픈 아이들이다.
무엇이 겨우 10여 년 밖에 살지 않은 우리 청소년들을 이렇게 아프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무섭게 바꾸어버린 것일까?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아니다. 여기서 오는 일탈도 일부 있겠지만, 근본 이유는 분명 아니다. 결국 어른들이 그들을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소년에게는 공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끓어오르는 반항심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길은 공감이 유일하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공감해 주는 누군가가 있는 청소년이라면 어려움이 변해 내적 능력이 되고 위기가 기회가 된다.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가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기란 불가능하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문제 있는 부모가 있을 뿐이다. 문제 청소년은 없다. 문제 어른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뇌는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만 관찰하고 느끼지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도 마치 거울을 보듯이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이 있다. ‘거울 뉴런’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공감 세포를 우리의 뇌에 만들어 넣어 주신 것이다. 이 세포는 쓰면 쓸수록 더욱 촘촘하고 정교해진다. 따라서 인생 경험이 늘어날수록 공감 능력도 더욱 풍부해져야 정상이다. 나이 먹어 갈수록 상처를 주고받고, 충돌하고 갈등하는 일은 줄어들어야 맞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건 공감 능력을 유지해 주는 세포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능력이 지극히 떨어진 것이다. 엄마는 내 아이의 마음 상태에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 아이는 엄마와의 조율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읽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조율하는 능력을 기른다. 어린 시절 누군가로부터 이런 공감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정서를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정서 공명’이라는 작용이 있다.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웃게 되고, 슬퍼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면 함께 슬퍼지는 작용이다. 한 사람의 감정이 다른 사람 속에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이 마치 물리학에서의 공명 작용과 비슷하다 보니 정서 공명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런 정서 공명이 잘 훈련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친구를 ‘나의 슬픔을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1996년에 미국 콜로라도에서 아메리카 인디언 남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공동체 철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공동체 안에서는 한 사람의 영광이 곧 모두의 영광이고, 한 사람의 고통이 곧 모두의 고통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자연과 양심을 통해 얻은 관계에 대한 놀라운 지혜가 있었다. 이 땅의 청소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공감하고 정서가 공명하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친구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일이다. 입시가 전부인 교육에서는 결코 이런 능력은 계발될 수 없다. 우리 청소년의 아픔은 교육의 자리를 대학 입시에 내어 주었을 때 시작되었다. 입시마저도 친구들이 서로 도우며 준비하는 그런 교육은 불가능한 것일까? 공감 능력을 배양하면서 공부하는 학교는 지나친 이상일까? 내 자녀와 주변 청소년, 그들 모두의 아픔을 지적하기보다 먼저 공감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교육의 목표를 학업의 성취만이 아니라 공감 능력의 발달에 둘 때, 비로소 이 땅의 청소년은 살아나게 될 것이다.
이재훈 목사
<온누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