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당과 송의 영향을 받은 시대였다. 고려의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왕실의 권위와 국가 질서를 침해하는 행위, 가부장적 가족 질서를 침해하는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는 참하거나 교수형에 처했다. 절도한 양이 5관 이상이면 사형에 처하고, 공갈로 재물을 20필 이상 취한 자도 사형에 처했으며, 고의로 방화한 자는 일정한 조건 하에서 사형에 처하였다.
조선시대는 중국의 대명률을 받아들여 경국대전(1471)과 대전회통(1865)을 제정하였다. 사법기관으로 중앙에 법사가,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들이 관찰구역 내에서 사법권을 행사하였다. 대명률에는 사형의 처벌방식으로 교수형과 참수형이 있었고 특수형태로 능지처참과 효수 등이 있었다. 왕권에 대한 도전, 강간과 간통, 노비의 가장에 대한 모독 등이 사형에 처하는 범죄였다.
사형의 집행에는 추분 이후, 입춘 이전의 때를 기다려서 사형을 집행하는 대시결행과 죄를 범한 사형수와 강도범을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사형을 처하는 부대시결행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비록 사형제도가 있었지만 왕의 재가를 받고 형을 집행하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고, 삼복심(三覆審) 제도를 두었으며 심지어 얼굴에 자를 인각 후 호적을 지우는 것으로 사형을 대신하였다.
조선왕조의 사형은 능지처참(凌遲處斬), 효수(梟首), 기시(棄市), 오살(五殺), 교수(絞首), 거열(車裂), 포살(砲殺) 등 다양했다. 능지처참은 신체의 살을 잘게 저미거나, 신체의 특정한 부분에 칼로 상처를 내고 목을 베는 것인데, 이 능지처참에 처한 자는 시신의 매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의 사형 방법인 참형(斬刑)과 교형(絞刑) 중 참형에 해당한다. 효수는 참수한 후 머리를 간두(竿頭)에 매달아 일반백성에게 보이는 위하형(위협을 위한 형벌)이다. 기시는 왕의 교지(敎旨)를 위조한 자에게 적용했으며, 시장에서 집행하고 대중과 함께 범인을 버린다는 의미에서 위하형이다. 오살은 역적을 사형에 처할 때 쓰는 방법으로 먼저 범인의 머리를 찍어 죽인 후 팔과 다리를 베어버리는 순서로 집행했다.
교수는 참형의 방법으로 사형 후 매장이 허용되었다. 거열은 죄인의 지체(肢體)를 네다섯 개 수레에 매단 후 사방으로 수레를 몰아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포살은 1894년 육군 법률에 의거한 사형 일체를 포살로 집행하도록 하였는데 오늘날 ‘군형법’에 의한 사형이 총살로 하게 된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