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이후에 군종감실이 정책으로 연대에 군목이 배치되면서 연대교회에 선임하사로 누가 가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주위 상관들 특히 10중대장 김홍준 중위와 박영환, 신태준 두 목사가 나를 추천하여 자연스럽게 최전방 1선에서 2선으로 물러나 연대 본부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최전방 일선에서 후방 안전지대니 CP(본부)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 일은 단순히 복무현장이 변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평신도에서 직접 주님의 일을 돕고 협력하는 ‘선교봉사의 단계’로 접어드는 신앙생활의 전환이기도 했다.
중동부 전선의 ‘연대 군종부 선임하사’로 가게 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군인교회에서 군목을 돕게 되었다. 또 ‘군종 하사관’으로서 예배드리는 데 필요한 시중은 물론 일반 사병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에도 열심을 기울였다.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때부터 나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부와 사회부의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훈련시키시고 인도하셨던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세례의 감격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이 크고 더 알아감을 사모하는 마음도 뜨거웠지만, 나는 그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세례가 무엇인지,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를 알려 준 사람은 기재계 배 하사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은 모두 세례를 받을 수 있지만, 세례를 받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회개였다. “세례를 받으려면 먼저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하루 날을 잡고 하나님께 회개하기 위해 야산에 올라갔다. 차가운 눈밭에서 젖은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 놓고 밤새 철야기도를 하며 회개할 작정이었다. 난생 처음 하는 산기도라 나는 매우 비장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저는 죄인입니다” 그 한 마디뿐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짜내어도 다른 기도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저는 죄인입니다’만을 수차례 반복하다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제대로 된 회개를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서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어떤 가식도 없이 입술로 뱉어냈던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보다 더 깊은 회개가 어디 있을까.
나는 1952년 4월 부활주일에 사단 군인교회에 신태준, 박영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당시 사단장이던 송요찬 장군은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큰 행사 때면 사단 군악대를 동원하여 경쾌한 연주를 하게 하는 등 분위기를 잘 돋아주는 분이었다. 세례를 받고 사단장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자 갑자기 복받치는 감격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주는 기쁨, 희열,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세례를 받기 전날 밤 색다른 꿈을 꾸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온몸을 깨끗이 씻어 내려가는 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서 과거의 죄를 씻김 받는 계시의 꿈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나는 세례를 통해 주님의 아들로 명백히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하나님과 함께 한 전도 사역
1951년 성탄절에 내가 모시고 있던 이윤생 군목이 후방으로 위문품을 모집하러 갔다가 자동차 사고로 귀대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 뜻밖에 군목의 자리가 비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나는 오랜 고민하지 않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김진평 중사를 설교단에 세웠다. 김 중사는 평양에 있는 큰 교회에서 유년부 부장으로 섬기다 피난와서 군에 입대한 사람으로 대지설교에 능한 사람이었따. 그에게 듣기로 평양에서 유리가게를 경영하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던데, 성경말씀을 어찌나 잘 외우며 인용하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세상 지식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그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군목의 자리를 김진평 중사로 채우고는, 우리는 최전방 고지를 찾아다니며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때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아 자주 OP 지역에 가서 전도를 했다. 그런데 연대 후방인 CP에서 OP까지 나가려면 십여 리를 걸어가야 했다. 시간도 아까웠고 무엇보다 몸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OP로 나갈 때마다 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주님, 지금 전도하러 갑니다. 한 명이라도 더 전도하려면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떠날 때 지프나 쓰리 코타(중간형 트럭)를 만나게 해 주세요.” 놀랍게도 나갈 때마다 지나가는 자동차를 만나게 되었고, 거뜬히 무임승차를 할 수 있었다. 요즘이야 어디를 가도 차가 흔하지만, 당시 강원도 중동부 산간 지역에는 하루 종일 있어도 지나는 차 한두 대를 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전도를 위해 나설 때마다 차를 만난 것이 어찌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확신으로 늘 기쁨에 차 그 길을 다녔다.
그렇게 수월하게 이동을 한다고 해도 또 하나의 관문이 남아 있었다. 중대장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중대별로 전도집회를 열게 해 달라고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대장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싸늘했다. 사병들을 모아 놓고 전도집회를 하다가 만약에 적군의 포탄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몽땅 죽게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지켜주실 테니까요!” 당시 나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담대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염려들에 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하도 박박 우기니 중대장들도 어쩔 수 없었는지 허락을 했고, 나는 신이 나서 최전방 능선 8부 후방에서 사병들을 모아 놓고 전도집회를 이끌었다. 수십 차례 전도집회를 열었고, 김진평 중사의 설교는 사병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야말로 손발이 착착 맞았다.
감사하게도 전도집회 동안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무슨 사고라도 생겨 사병이 하나라도 죽거나 다쳤다면, 전도집회는 중간에 멈춰져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탈 없이, 내가 중대장들에게 보인 담대함대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내 평생을 통해 그때만큼 전도를 무지막지하게 한 적은 없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병들을 전도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던 시절이었다. 신앙적으로 더할 수 없이 행복한 날들이었고 늘 성령이 함께하심을 느끼는 새롭고 기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때를 더욱 특별하게 기억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나 역시 군인교회 예배에서 평신도 신분으로 김진평 중사와 번갈아 가며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 하늘나라의 소망이 충만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열정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