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긍휼함은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 시대의 어려움에 처한 청소년들이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해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한다.
40년 전 전체 인구의 약 37%를 차지했던 청소년 인구(9~24세)가 저출생 여파로 2023년 15.3%로 줄었고, 앞으로 40년 뒤에는 10%대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농어촌 초등학교 폐교의 시작으로 2023년에는 서울 도봉고등학교가 폐교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인구의 절벽시대를 살면서 청소년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실감하게 된다.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원인 1위는 ‘자살’, 중고생 10명 중 3명은 최근 1년 내 우울감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정의 붕괴와 역할의 마비로 인한 애착손상은 거절감과 불안감으로 채워지고 학교생활에 부적응으로 이어지며 마음속에 ‘거절-낙심-절망-원망-좌절-포기-죽음’이라는 심리적 고뇌를 겪으면서 학교폭력과 청소년비행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촉법소년의 문제는 심각성이 더해가고 ‘나이를 낮춰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견해와 ‘교화를 통한 사회적응을 유도해야 한다’는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사랑이 메말라 울부짖는 청소년들의 아우성에 폭력적인 대처가 또 하나의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이 깊어진다.
희랍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는 ‘침대를 만들어 놓고 길가는 사람을 데려와 침대보다 크면 손발을 자르고 작으면 손발을 늘렸다’고 한다. 이처럼 부모들은 모범생의 틀을 만들어 놓고 동일한 행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돌보기보다 성공이라는 초점에 맞추어 보이지 않는 폭력을 자행하고 청소년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있다. 출생률만큼 청소년들을 건강하게 지켜내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무관심한 현실은 가정밖, 학교밖, 자립준비, 은둔형고립, 홈리스, 비행청소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방치되어지고 범죄의 늪으로 빠지게 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공감을 넘어 환대함으로 행복한 삶의 등불이 되어 주기를 기도해 본다.
나는 살아오면서 늘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 편이 되어 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위해가 아닌 함께하는 사랑’으로 품고 가라고 하셨다.
얼마전 만난 위기청소년(중2)은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이고 어머니는 6개월전 소년이 보는 앞에서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동생은 보육원으로 보내져야 했고 아버지와 단둘이서 지내는 소년은 그 충격으로 학교에 나가지 못한다. 부모가 쥐어 준 운명이라는 선택을 받아들고 신학기가 되면 학교에 복학해야 하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소년에게 갖고 싶은 신발 하나를 사주고 어깨를 다독였다. “감사합니다. 장로님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작은 나눔이 소년의 가슴에 예수님 사랑으로 느껴지는 희망의 씨뿌림이 될 것이다.
목사님께서 “건강의 어두운 밤이 오기 전에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섬기고 물질의 어두운 밤이 오기 전에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나누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형제들이 섬김과 나눔으로 영성을 회복하고 청소년을 살려내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사명자로 바로서기를 바란다.
윤용범 장로 (경기중앙교회)
•청소년행복재단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