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겸손! 세상을 이기는 최고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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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의 ‘나는 모자라고 못났습니다.’ 라는 울림을 주는 글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던 《배삼룡(裵三龍, 1926~2010)》이라는 코미디언이 있었다. 그가 입은 옷차림부터 웃음이 나왔다. 헐렁한 통바지에 낡은 넥타이로 허리를 질끈 묶고 바지 한쪽은 삐죽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남의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헛말을 지껄이기도 하고, 문을 찾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도 보였다. 바보 같은 그 모습에 사람들은 악의 없이 웃었었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새 그는 구시대의 희극인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개그맨 시대가 왔다. 어느 날인가, 그가 칠십대 중반의 노인이 되어 병원에서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는 모습이 TV에 나왔다. 그 무렵, 삶의 불꽃이 꺼져가는 그 사람과 한 기자가 인터뷰한 기사가 나온 걸 봤다. 늙고 병들어 있으면서도 그는 아직도 그를 찾는 무대가 있으면 나가서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기자에게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냥 나는 당신보다 좀 모자라고, 생긴 것도 못났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어요.”라고 했다. 이를테면 그의 바보 연기의 요체(要諦)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삶의 비결은 상대보다 한 계단 내려가 무릎을 꿇는 자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1970년대 말, 군 법무관 시험을 보고 훈련을 받기 위해 「광주(光州) 보병학교」에 입소했었다. 그곳에는 두 종류의 그룹이 합류해 함께 훈련을 받았다. 한 부류는 나같이 고시에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차선책으로 법무장교 시험을 보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십 년이라는 기나긴 복무기간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한 부류는 고시에 합격하고 짧은 군 복무를 위해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제대를 하면 전원 판사나 검사로 임관이 되고 시간만 흐르면 앞날이 보장되는 사람들이었다. 

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나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잘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猜忌心)이 있었다. 그런 ‘시기심’은 실속 없는 ‘건방짐’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독특한 겸손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 지방대를 나온 그는 얼굴도 미남이 아니고 덩치도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 자신을 낮추면서 공손하게 상대방의 훌륭한 점을 인정했다. 

나는 그와 같이 전방으로 발령이 나서 이웃 부대에서 근무했다. 나는 건방졌다. 계급이 높은 사람을 만나도 ‘나는 나다, 너는 누구냐?’라는 식으로 대해 적(敵)을 늘려갔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다. 사병(士兵)에게까지 겸손하게 그리고 살갑게 대해줬다. 그는 항상 만나는 사람 앞에서 ‘나는 당신보다 못난 사람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렀다. 동기생 중에서 그가 제일 먼저 장군이 됐다. 그 얼마 후 그의 장군 계급장에는 별 하나가 더 붙었다. 장군이 되어도 그의 태도는 예전과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별판에 여러 개의 별이 달린 검은 장군차를 타고 어깨에 번쩍거리는 계급장을 달고 으쓱거릴 만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실패한 동기생들을 보아도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게 대했다.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국제형사재판관’이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유능한 판사들이 차출되어 근무하는 곳이다. 십여 년이 흐르고 그는 육십 대 중반이 되어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그는 ‘국제형사재판관’으로 재추천(再推薦)되어 유럽으로 향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관들이 그를 좋아해서 다시 재판관으로 모신 것 같았다. 

칠십 고개에 다다른 그는 아직도 열성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한번은 그의 입에서 “나 같은 놈이 성공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모두 주님의 덕(德)입니다.”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철저히 겸손했다. 위선적(僞善的) 겸손이나 처세적(處世的) 겸손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성공을 보면서 세상을 이기는 가장 무서운 힘이 ‘겸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동기생인 그의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는다. 성경 속의 예수는 수건을 허리에 동여매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하나하나 씻어주고 있었다. 자세를 낮추고 무릎을 꿇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세상을 이기는 최고의 지혜가 ‘겸손’인 걸 나는 그땐 몰랐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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