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자족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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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사랑과 염려를 담은 선물을 보내준 데 대해 사도는 깊은 감사를 표하는 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고난에 대해 사랑과 위로를 표시해 준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한 감사의 인사이기도 하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후한 친절과 대접에 의지하고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 온 자신의 삶을 지속시키고 싶어 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온 사도이다. 

사도가 말하는 ‘자족'(自足, Self-Sufficient)은 상황이나 조건이나 환경과 관계없이 충분히 감사하며 만족한다는 것이다. 고백하는 대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한 것이다. 육체에 가시가 있었음에도 사도는 자족했다. 지병(持病)이 있었던 디모데에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고 가르친다.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한 믿음의 열매이다. 자족한다는 것은 상황에 지배당하거나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법적이고 공정하게 상황을 개선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더라도 거기에 지배당하고 절망해서 주저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황이나 조건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나 부유해 넉넉한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우리는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떠올린다.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한다. 응답을 빨리 받지 못하면 낙심하기도 한다.

자족하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침체되지도 않고 부유하다고 들뜨거나 해이(解弛)해 지지도 않는다. 모든 상황이 자유롭다. 참으로 경지 높은 삶이다. 그런데 눈여겨 봐야 할 표현이 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하는 비법(秘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험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육체의 가시’에 대해 사도(使徒)는 그 가시가 힘들어 물러나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시를 뽑아 주시지 않았다. 그때 배운 교훈이 바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였다. 이렇게 사람은 배우며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육체의 약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온전하게 만들어 완성시켜 가시는 과정의 하나로 본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거나 닥치든지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존경받던 교회 지도자들이 인생 끝자락에서 실덕(失德)하는 이유는 자족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탐욕(貪慾)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래 참는 믿음의 능력이다.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중인들”은 참음으로 약속을 바라보았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힘을 얻고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순례의 길에서 만나는 혼란, 번민, 갈등, 슬픔, 고난 등에서 인도해 주심과 모든 위안의 근원이 우리 생명의 구주이신 주님의 말씀과 성령님께 있다. 우리는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경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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