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회 주제인 ‘용서, 사랑의 시작입니다’는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에는 ‘미안해’라든가 ‘용서’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용서란, 분노나 상처 혹은 원한이 있을 때 푸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그런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13장).
지난 명절에 긴 연휴로 그간 만나지 못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 얽히고 맺혔던 것을 풀기도 합니다. ‘얘들아,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마냥 어릴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소유인양 마음대로 휘둘렀던 지난날을 후회하는 부모된 이의 고백입니다. 또한 자녀라는 것이 당연한 특권인 것처럼 반항했던 지난 시간을 참회하며 ‘아빠, 죄송해요’, ‘엄마, 미안해. 용서해 주세요.’라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절제함 없이 내뱉는 말과 행동이 아픔이 되고 상처를 냅니다. 이에 대한 화해의 두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용서하며 ‘괜찮아, 다 지난 일인데’, 또 하나는 ‘왔으니 됐다’, 혹은 ‘아냐, 난, 화나지 않았어. 괜찮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안타까울 뿐 원한이 없는 응답입니다. 이는 용서라는 말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의 복음에서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방탕한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돌아올 몫을 미리 빼앗듯이 받아 집을 나갑니다. 어쩌면 그는 집을 떠날 때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거지꼴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습니다.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먹고 즐기자’라고 마치 죽었던 자가 살아 돌아온 것같이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단지 돌아왔다는 사실로 다 된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분노나 징계나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용서도 없습니다. 용서는 원한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의로우시고,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개념에는 악이나 죄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셨고, 복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순리요 창조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복된 길로 인도하시고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지 않는 이가 당하는 거슬림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합니다.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고 겪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십니다(시편 10:8~11).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모두에게, 그리고 누구든지 순종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용서도 없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문화에서 사용되는 단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원한을 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하심으로 선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법칙을 따르기만 한다면 ‘됐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가을에 모든 것이 회복되는 은혜의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규동 목사
<동해제일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