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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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대인에게는 우상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돈, 명예, 그리고 권력이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로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Descartes, 1596~ 1650)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겼지요. 이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I think, therefore, I am.”인데 물질지상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이 명언을 바꾸어서 “나는 소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I have, therefore, I am.”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서양 철학자가 인간의 존재의 근거를 ‘사유(思惟/생각함)’에서 찾았다면 현대인들은 존재의 근거를 ‘소유(所有)’에서 찾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크기(size)’가 중요합니다. “그는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 “그 교회는 교인이 몇 명이나 모이느냐?” “그 교회의 연간 예산은 얼마인가?” “그가 받는 연봉(年俸)은 얼마나 되나?” 사실인즉, 내가 받는 월급 200만 원으로 나는 충분히 살 수 있는데 옆집의 월급 500만 원을 보고 속상해 합니다. 그렇습니다. ‘상대적인 빈곤감’이 현대인을 멍들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불행은 ‘풍요로운 생활에 익숙해져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에 대한 감격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 한 구절을 떠올려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수고’에 대해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강같이 흐르게 하시겠다는 말씀인 줄로 압니다. 또 우리의 수고에 대해 주님께서 친히 보상해주시겠다는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도 고뇌와 갈등과 다툼이 있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내 이익, 내 명예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지요. 나 자신을 위해서, 또 내 이익을 위해서 일하면 당연히 갈등이 생깁니다. 오해가 생깁니다. 불평과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나의 일, 나의 명예’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여야만 ‘보람 있는 수고’가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내가 신일고등학교에서 10년간 교장님으로 모셨던 장윤철(張允哲, 1908~2004)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 어른은 노년에 이르러 자녀들이 사는 뉴욕으로 이주하셨습니다. 제가 1980년대 초, 미국 서부에서 공부하던 때, 방학 중에 뉴욕에 계신 장윤철 교장님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장 교장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미국에 와서 살다 보니 한국이 그립고 친구가 그립고 그래요. 내가 6남매를 낳아 길렀는데 그중에 딸 하나라도 한국에 있었으면 내가 미국에 오지 않았을 텐데!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할 일이 참 많을 텐데!”하시는 거예요. 

제가 장 교장님께 여쭤보았습니다. “교장님의 연세가 80이 다 되셨는데 무슨 하실 일이 그리 많으셨겠어요?” 했더니 장 교장님께서는 “내가 출석하는 영락교회 유년주일학교에 가서 아이들의 신발만 정리해도 얼마나 보람이 있어요?” 당시 그 말씀을 듣고 ‘이 어른께서 몹시 외로우시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하, 이 어른께서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의 소중함을 말씀해주신 거였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는 ‘숫자나 양’의 많고 적음이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모두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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