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우레의 아들,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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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세베대와 살로매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사도 시대의 첫 순교자인 큰 야고보와 형제이다. 학자들은 요한이 98살까지 생존한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前) 젊어서 직업은 어부였고 갈릴리 뱃세다에서 베드로, 안드레, 빌립과 함께 일했다.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는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것 같다. 하인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살로매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후원했다. 예수님 장사(葬事)할 향유를 구입하고 마지막까지 십자가 곁에 있었다. 또한 주님의 열린 무덤을 처음 발견한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이나 갈릴리에 가옥(家屋)을 소유하고 있어 그곳에서 우리 주님의 어머니를 모시기도 했다. 혈통으로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 쪽으로 예수님과 사촌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주님과 더욱 친밀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바울처럼 랍비 훈련을 받은 적은 없고 베드로와 다른 갈릴리 제자들처럼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이었다. 다만 세례 요한의 예비학교를 다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레’라는 말은 기질이 열정적이고 힘과 활기가 넘치는 성격을 가리키는 개념이 있다. 천둥은 소나기를 동반해 공기를 맑게 하고 땅을 비옥하게 한다. 불같은 성격이 통제력을 잃으면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이성의 통제를 받으며 진리에 사로잡힐 때는 위대한 건설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레’의 아들 요한에게는 열정과 헌신이 충만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데는 훈련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베드로와 바울이 교회의 터를 닦고 교회를 세웠다. 사도 요한은 교회를 하나로 통일하고 공고(鞏固)히 하는 사명이 주어졌다. 요한은 베드로처럼 행동가도 아니고 바울처럼 선교사도 아니다.  그는 교회의 성장과 교인들의 내면 생활을 가꾸는데 이바지했다. 1세기 말엽까지 생존한 은혜에 의해 사도 시대의 터전 위에 교회를 세워갈 수 있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순교에 의한 투쟁적인 사도직과 하늘의 안식으로 평화롭고 사려깊은 사도직의 차이인 것 같다.

각자가 예수님을 세상 끝날까지 전하는 사도적 사역의 각 측면을 나타내 준다. 사도 요한이 쓴 성경은 누가 주석을 해도 고갈(枯渴)되지 않는 높이와 깊이가 있다고 한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함께 성전 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베드로와 함께 산헤드린(Sanhedrin, 유대인 최고 의결 기관, 일종의 의회) 앞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요한계시록은 그가 소아시아 교회들의 지도자였음을 나타내 준다.

사도 요한은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 교회가 심각한 위기와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생각을 하고 고아와 같은 교회를 맡을 결심을 했을 것이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Patmos)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 섬에서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심판과 교회의  승리에 관한 계시를 받는다.

밧모섬 유배 시기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전승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재위(AD 81~96) 말년으로 본다. 도미티아누스는 기독교를 혹독하게 박해한 황제이다. 그는 ‘추방’을 형벌로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견해는 네로 황제 때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네로가 즉은 직후 AD 68~69년쯤에 계시록을 쓰고 에베소에 돌아와 복음서와 서신서를 쓴 것으로 말한다. 어느 견해가 옳건 간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신인(神人)의 인격을 갖추신 분으로 기록한다.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의 근원으로서 기록한다. 그가 쓴 복음서와 서신서는 교회의 고귀한 유산이 되고 있다.

말년에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강단에 오르면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켜도 족합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고 한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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