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유신론적 실존주의 : 키에르케고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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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후의 분위기는 음산했다. 인류의 거대한 비극이었던 전쟁은 실존주의 철학을 유행하게 만들었다. 관념적인 것에서 떠나 삶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문제로 삼았다. 사는 것은 매사의 선택의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저서 중에 「양자 택일」이 있다. 이 책에서 약화(弱化)되어가는 기독교를 비판해 유럽 기독교를 놀라게 했다. 계몽주의(啓蒙主義) 철학이 풍미하던 시대에 정체성(正體性)이 흔들리던 교회를 향해 쓴 소리를 한 것이다.

그의 기도이다.  “주님의 불변하심에 무조건 순종을 함으로 안식을 찾게 해 주소서.” 그의 신앙관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주님은 영원한 사랑이시다.” 이 확신을 가지라고 했다. 이웃을 향한 사랑도 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내게 불편함이 생기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님의 사랑에 불평하고 그 지고(至高)한 사랑을 의심한다. 나는 참으로 어리석고 유치하다. 이는 죄가 나를 주장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주요 개념이다. 현대인은 향락을 추구한다. 미적(美的) 실존이다. 외면적 쾌락의 노예 생활이다. 향락 속에 빠지면 본래의 자기를 잃어 버린다. 그러다가 자신을 보는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윤리적(倫理的) 실존으로 나아간다.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도덕적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내가 미워하는 악을 행한다.” 때문에 엄격한 도덕률 앞에 자기의 무력(無力)과 부족과 추악함을 통탄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의 빛을 찾는다. 여기서 종교적(宗敎的) 실존의 단계로 올라간다. 자기에게 한번 절망할 필요가 있다. 현실의 나는 죽어야 한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라는 역설적 표현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 오히려 죄인이므로 긍휼(矜恤)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신다.

과거의 내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말고 주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용서의 은총을 생각하며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내 작은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받으신 멸시가 어떠했는가! 조롱하며 침을 뱉었다. 왕관(王冠) 대신에 가시관(冠)을 씌웠다. 옷을 놓고 제비를 뽑았다. 나무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다. 우리는 무지했고 저들은 무법자였다. 불구하고 외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무엇인들 은혜로 주시지 않겠는가!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구하지만 사실상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나 같은 죄인이 어찌 주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순종할 따름이다. 순종이 가장 아름다운 믿음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이다. 죄를 고백함으로 주님이 내 가까이 계시는 줄로 믿어야 한다.

그의 철학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인가? 바로 죄이다.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고통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 내게 지혜를 주셔서 주님의 구원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를 받아들일 수 있게 순수한 마음 주시기를 구해야 옳다. 키에르케고르의 기도이다. “내 삶이 번영할 때는 감사하게 하시고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는 집중력을, 고통스러울 때는 인내심을 주옵소서. 노년에는 주님의 은혜를 새롭게 기억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날마다 회개하는 영을 주옵소서. 내 마음이 주님의 성전되게 하옵소서.” 나도 이러한 기도를 드리고 싶다.

키에르케고르가 추구했던 신앙의 본질은 제자들조차 그리스도를 부인하던 불안의 순간에  그리스도께 충실했던 자는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였다. 강도의 신앙은 그의 마지막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서 나 자신이 아니겠는가! 현대의 혼란과 무질서, 죄악에서의 구출은 탕자의 귀환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뿐이라는 생각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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