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선교 100년과  김영훈  목사 (22) 조국에서의 목회 활동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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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8월에 수정을 마친 “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는 장로회 총회가 설립된 1912년부터 1923년까지의 각 노회의 역사를 수집해 편집한 귀중한 장로교회 역사책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학도(學徒)들의 필독서이다.

1968년에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백낙준 박사 이름으로 발간한 “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 下卷”은 바로 김영훈, 함태영 목사가 1930년 7월과 8월에 중국 안동현에서 수정작업을 완료한 소중한 원고였던 것이다.

수정자(修正者) 김영훈 목사가 “朝鮮예수敎長老會 史記”의 “사기후(史記後)”를 1930년 8월 20일에 기록하였으며 편집수정을 마쳤으나 발간을 못하고 8.15해방과 6.25전쟁을 지나고 있었다.

6.25전쟁 기간에 오윤태(吳允台) 목사는 부산 피난지에서 함태영 목사를 래방(來訪)하였다.

이미 언급한 대로 함태영 목사는 김영훈 목사와 함께 1930년 7월 18일부터 8월 22일까지 중국 안동현에서 사기 수정작업을 하였던 분이다.

김영훈 목사는 8.15 해방 이전에 별세하였으나 동료 수정위원 함태영 목사는 사기 완성고본(完城稿本) 1부를 부산 피난지(避難地)까지 휴대(携帶)하였고 간행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오윤태 목사는 그 원고의 간행을 실현시키려고 일본 동경으로 가져갔으나 역시 실현(實現)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원고를 입수한 한국교회사학회(韓國敎會史學會) 회장 백낙준(白樂濬) 박사는 원고를 서울로 가져와서 자신의 이름으로 1968년에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출판부에서 발행하기에 이른다.

1930년 8월에 중국 안동현에서 김영훈, 함태영 목사의 수고로 수정을 마친 이 소중한 역사책은 일제의 패망과 6.25전쟁 시기를 거쳐 1968년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1928년 9월에 총회장이 중임(重任)을 잘 마쳤으며 총회 신학교육부 부장, 금강산 수양관 건축기성위원회 실행위원, 총회사기 검열위원, 만국장로회와 갱정교연합회 동양발기회 조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만국장로회와 갱정교연합회 동양발기회 조직은 1928년 총회에서 별위원 윤산은 선교사 보고로 가결되었으며 조직위원 한석진, 량전백, 윤산온, 정인과, 김영훈, 전필순 6명으로 조직되었다.

1928년 가을에 장로교 총회장의 중임을 내려놓은 김영훈 목사는 그 해 11월 13일, 그가 담임하는 의주 서교회에서 감사절(感謝節)을 지키고 있었다.

의주 서교회 감사절 예배는 김영훈 목사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당일 감사헌금이 180여 원이었다고 기독신보(基督申報)가 보도하였다.

의주 서교회는 감사절 다음 날인 11월 14일부터 정주 지방의 림종순 목사를 강사로 청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사경회 기간에 새벽기도회와 성경공부 모임에는 300여 명이 참석하였고 저녁집회에는 800여 명씩 모여서 신령한 은혜를 받기도 하였다.

한국교회는 1907년을 전후하여 대부흥(大復興)을 맛보기 시작하였으나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시기에 일제에게 악랄한 탄압(彈壓)을 당하였으며 192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부흥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30-1940년대에 불어닥칠 시련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경험이었다.

중화민국 산동 선교사와 북미 한인교회 목회자로 활동하였던 김영훈 목사는 1922년 귀국 후 1932년까지 의주 서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노회와 총회 일에 폭넓게 참여하였다.

1928년에 총회장을 마친 김영훈 목사는 1929년 3월 8일에 거행된 서교회 강리순 장로의 장립식과 리근호, 조윤길, 김응명 씨의 집사 장립식 사회를 맡아 보았고 1929년 3월 23일에는 청산유치원(靑山幼稚園) 졸업식 사회를 맡았으며 남녀 32명이 졸업하였다.

그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청산유치원 원장으로 수고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수정위원으로도 활동하였던 김영훈 목사는 1929년 4월 10일자 “기독신보”에 교회사기 자료 관련 광고를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9년 9월 6일부터 경성 새문안예배당에서 개최한 제1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기간에 신학 교육부장 자격으로 신학교육부 보고를 하였다.

1930년 7월 18일부터 8월 22일까지는 중국 안동현에서 함태영 목사와 함께 장로교회사 제4편 수정작업을 하였으며 의산성경학교(義山聖經學校) 사업에도 동참하였다.

의산성경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는 1925년 가을 의산노회에서 창설하였다.

의산성경학교는 1926년 12월 5일에 김영훈 목사는 시무하는 의주 서교회 유치원을 빌려 개원하였고 원장 한석진 목사와 교사 3명, 남녀 학생 36명으로 시작하였다.

그후 5년간 입학자는 남자 44명, 여자 47명으로 합하여 91명에 이른다.

원장은 한석진, 안승원(安承源)목사가 교대로 시무하였으며 교사로는 김영훈, 류여대, 정상인(鄭尙仁), 김도순, 김석항, 박린도, 최득의(崔得義), 윤하영(尹河英), 리보식, 홍하순(洪河順) 씨가 교대로 교수하였다.

1930년대 천원(千圓)으로 집을 사서 성경학교 건물을 마련하였으며 1931년 2월 당시 직원은 원장 안승원, 원감 김영훈 목사, 교사 8명이 참여하였다.

의산성경학원 졸업식은 1931년 1월 14일 오후 7시에 의주 서교회 예배당에서 원장 안승원 목사 사회로 거행되었으며 졸업생 최애주, 리향림, 박정매, 김반석 씨 4명이 졸업하였다.

1931년에 김영훈 목사는 의산성경학원 원감이었으며 10월 15일에 거행된 의주 서교회 윤세명, 강인한 두 사람의 장로장립식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31년 10월 15일에 거행된 서교회 장로장립식 사회를 끝으로 공식 활동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김영훈 목사는 1932년 2월 중순에 개최된 의산노회에서 서교회 사면(辭免) 허락을 받게 된다.

김영훈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파송 중화민국 선교사와 의주 서교회 위임목사, 의산노회장, 양실학교 교장, 청산유치원 원장, 총회장을 역임(歷任)한 분으로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선교사 출신 목회자요 한국교회의 지도자였던 인물이었다.

1917년부터 1922년까지 미국에서의 활동도 훌륭하였으며 일제의 식민지 조국 독립을 위하여 일하였던 분이다.

당대의 서예가요 문장이 뛰어난 한학자(漢學者)였기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수정위원으로 총회를 대표하였던 인물이 되었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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