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하워드패인(Howard Payne) 대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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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패인 대학이 어떤 대학인가? 한국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미국에 사는 사람도 잘 모르는 대학이다. 그러나 역사가 90년이 넘은 침례교 대학이다. 이 시골 브라운우드(Brownwood) 지역의 제일 침례교 목사가 처남 Edward Howard Payne의 투자로 1890년에 이 학교를 세웠는데 1981년 내가 들어간 당시는 6개 대학에 400여 과목을 개설한 대학교로 발전하고 있었다. 

내가 1981년 학위 과정을 다 마치고 논문만 남겨 놓게 된 7월 여름 방학 때였다. 갑자기 침례교 대학의 부총장이라는 분이 나를 면접하고 싶다고 전화로 연락해 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국 전역의 20여 군데 대학에 가르치는 자리를 찾아 원서를 냈지만 아무 소식이 없어, 거의 포기하고 있는 때였다. 당시 나는 박사 학위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영주권 소지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전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덴턴의 한 모텔에 가서 만났다. 그는 수학 교수를 찾고 있는데 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던 질문이어서 나는 어리둥절하면서 2, 3일간만 여유를 주면 지도 교수와 상의해서 연락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지도 교수가 누구냐고 묻고 바로 연락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나는 덴턴에서 170마일 떨어진 하워드패인이라는 대학에 취직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고용계약서라는 것을 써 보았다. 내 이름이 적히고 수학과의 조교수로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연봉 1만 8,000불로 고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적은 봉급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 년 8,000불의 조교 봉급보다는 월등히 많은 것이었다. 그 밑으로는 13가지 조건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이 학교는 기독교 사립대학이라는 것을 알고 이 대학이 추구하는 기독교 원리와 이상에 합당하게 개인적인, 그리고 공적인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왜 ‘나’인가?”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미시간에서 두 번이나 박사 자격시험에 떨어진 것은 덴턴에서 그때 닦은 실력으로 학위를 마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UNT의 수학과 과장은 내게 아주 친절했다. 두 과목 밖에는 학생 지도를 맡기지 않던 규례를 깨뜨리고 나에겐 3과목을 가르치게 해서 내 경제난을 덜어 주었다. 이제 학위 과정을 마치고 논문만 남았는데 혹 직장이 있을까 해서 전국 각지에 원서를 냈던 것인데 또 먼 곳에서 초청을 받았다면 어쩔 뻔했는가? 하워드패인 대학은 운전으로 3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하나님은 이 직장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주신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미국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온 가족이 차를 몰고 170마일이 되는 침례교 대학을 찾아가 그 대학 선을 보았다. 작지만 아담하고 정감이 가는 대학이었다. 캠퍼스에는 밤 경기 시설이 있는 테니스장 두 개가 놓여 있고 피칸 나무가 우거진 뜰이 있는 집이 하나 보였는데 그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학교 소유 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직장과 집까지 준 것이다. 고용계약서에 서명하여 제출하자 부총장은 어떻게 해서 내가 채용된 것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내젓자 다음 학기를 위한 수학 교사 채용에 여섯 사람이 응모했는데 나를 빼고 다 학위를 가진 미국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채용 결정을 벌써 했는데 채용된 사람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다시 채용 광고를 낼까 아니면 과거 지원자들을 다시 한번 접촉해볼까 하고 있는데 내 서류가 자기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먼저 나를 만나보고 다른 조처를 할 셈이었는데 그냥 마음에 들어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기전여고에 들어간 것만큼, 또 대전대학에 취직이 된 것만큼 기적적인 일이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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