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18)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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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을 전후한 시절 ②

엠피로 연행돼 더 심한 조사받아

크리스천인 것 알고 대우 달라져

돈 돌려주고 지프차 태워 서울로

신학생 시절, 무대예술에 심취

태은 장로는 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태연히 서 있는 동생이 밉살스럽기만 했다.

미 헌병은 마침내 여덟 개 모두를 찾아냈다.

그들은 돈을 압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화폐를 너무 많이 소지한 경위를 조사한다고 하며, 광은을 데리고 자기 상관에게 갔다.

동생을 떠나 보내고 태은 장로는 개성역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는데도 광은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서울행 짐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또 서너 시간 기다렸으나 동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으로 아주 이별이구나.’

태은 장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개성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태은 장로는 친지가 있는 한양교회에 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날 새벽 날이 훤히 샐 무렵이었다.

“형님 계세요?”

“아니, 네가 웬일이냐?”

태은 장로는 광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엠피한테 연행되어 갔지요. 본부에는 엠피 소위가 있더군요. 그 소위가 책임자래요.”

거기서 더 심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소지품을 조사하다가 광은이 읽던 영어 성경책이 나오니까 크리스천이냐고 묻더란다.

“크리스천일 뿐 아니라 신학생이라고 대답했더니, 자기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대우가 달라지더군요.”

커피를 권하고 식사 대접을 하더니 고향 이야기가 나오고 부모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지금 형과 생이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자기가 뒷수습을 책임지겠다고 하더란다.

그는 부하에게 명령해 지프차 한 대를 동원하더니, 즉시 서울에 태워다 주라고 해서 밤새 차를 몰아 서울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돈도 모조리 다 내어 주어서 한 푼 축내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는걸요.”

신학생으로 훈련받던 무렵

황광은 목사와 그의 가족이 월남한 후 황광은은 어릴 때부터의 꿈인 불우한 이웃의 참된 벗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자기가 성직자가 되어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설교 본문대로 행하는 것이 성직자의 길이라는 사실을 매일 다짐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황광은 목사와 그의 가족이 월남한 후의 생활에 대해서 앞에 인용한 바 있는 이도명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용암포 사건 이후 헤어지게 되었던 황광은 목사를 내가 월남한 1947년 5월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용산구 원효로에서 그의 부친 황도성 장로님께 인사를 드렸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황 장로님은, “도명이가 왔어? 참, 잘했구만!” 하시면서 반겨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단신으로 월남한 나는 황태은 장로님 가정에서 황광은과 그의 동생 황정은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그 집에서 얼마동안 머물면서 많은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어려운 피난 시절에 나의 유치원과 주일학교 시절의 선생님이셨던 김수화 권사님(황태은 장로 부인)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것은 일생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그때 신학생이었던 황광은은 학교에서 돌아와 밤늦게까지 영문서적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후 나는 인천으로 가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황광은과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보헤미안 시절

서울로 올라와 차분히 한국신학대학에서 학업에 열중하던 1946년부터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던 1948년까지 만 3년 동안은 황광은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보헤미안 기질이 넘치던 때요, 또 예술적인 기질이 넘치던 낭만적인 때이기도 했다.

황광은은 그때 이종환과 함께 이인선 목사 담임인 서울교회 한 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남대문로 상동교회 뒤에 위치한 서울교회는 원래가 적산 가옥인데 거기에다 방을 꾸려 자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말은 이종환과 함께 자취생활을 한다고 했으나, 그 당시를 알고 있는 극작가 이보라(李保羅) 목사의 말에 의하면, 밥짓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것은 언제나 황광은 쪽이었다고 한다. 이따금 자취하는 방에 놀러 가보면 광은은 언제나 가사일에 바빴고, 이종환은 언제나 자리에 누워 소설을 읽든가 아니면 소설을 쓰느라고 바빴다고 한다. 그런데도 광은은 불평 한 마디 없었고, 친구들을 웃는 낯으로 대하며 정성껏 대접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의 일은 유호준, 전인선, 이덕흥 등 여러 원로들이 기억하고 있어, 지금도 기회가 날 때마다 어제 일처럼 회상하곤 한다.

이른바 ‘다섯 동무’라고 해서, 같은 한국신학대학 학생들끼리 서로 어울려 다닌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다섯 동무’란 김선목(金善穆), 이보라(李保羅), 이연호(李淵瑚), 김인선(金仁善), 그리고 황광은이었다.

그 ‘다섯 동무’에서 이종환이 빠진 것이 좀 의외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뒷날 황광은이 <녹십자 시절>이란 글에 쓴 내용으로 보아, 그때 이미 이종환은 소설을 쓴다면서 좀 ‘거물급’처럼 행세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어쨌든 그 무렵에 광은은 예술에, 특히 무대예술에 심취되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그때 발랄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원예술좌’의 멤버이기도 했고, ‘예술무대’의 동인이기도 했다.

그때 함께 무대예술에의 정열로 가슴을 태웠던 젊은이는 김승배, 김선희, 민 구, 박사도, 이종정, 전수옥, 차조웅, 최선애, 한우석, 홍석관 등등이었다. 그들은 연습하다 피곤에 지치면, 그때는 서울에서 까마득히 떨어진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김포로 가서, 당시 약방을 하고 있던 정 준(鄭濬)의 집에 들러 점심을 얻어 먹기도 했고, 그것도 싫증이 나면 그 무렵 시인이 되겠다고 문학청년 행세를 하던 임인수(林仁洙)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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