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2) 평양교회 개척자 한석진 목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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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현교회 등 후배들에 넘겨주고 개척 위해 떠나

소학교 시작으로 농촌 초등교육 기관 설립의 시초

교인들의 건축헌금은 3년에 나누어 내게 했다. 첫 교인들의 헌금을 작정했는데 3천 원의 연보를 냈다. 교인들은 많은 헌금에 스스로 놀라웠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트리니티 교회에서 신축될 교회에 풍금을 준비하기 위해 모금했는데 250여 명의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10센트씩을 내서 보냈다. 예배당 건축이 거의 완성됐을 때 샌프란시스코의 몰톤(H.D.Morton)과 가렡(S.T.Garrett) 여사가 큰 종과 종루를 기증했다. 주님 오실 때까지 평양성과 근교까지 들리기를 희망했다. 새벽기도회 시간을 알리며 주일 예배 시작을 알리는 초종과 재종이 울렸다. 한 번 울리면 30리까지 퍼졌다. 그러나 장대현 교회의 종은 왜정 말기에 소위 ‘공출(供出)’로 빼앗겨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도 기독교 박멸의 한 수단이었다. 

한석진 조사가 자기 손으로 창설한 널다리골교회와 장차 발전해 대교회가 될 장대현교회의 주도권을 자기의 전도를 받은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농촌인 소우물에 나가서 개척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는 새로운 일꾼이 많이 생겼다. 이 교회는 새 일꾼에게 맡기고 나는 다시 교회를 개척한다. 개척 사업이 내게는 적당한 일이다”고 그는 기도하는 중에 늘 다짐했으므로 널다리교회를 떠났다. 본래 독립심과 자주정신이 강한 그는 당시 교회를 설립하고 지도하는 일에 선교사들의 주관으로 운영된 데 그는 은근히 불만을 느꼈다. 또 농촌과 가난한 이들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침략의 마수가 점점 가까운 것을 알고 농촌에서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깨우치고 교육하고 예수 믿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촌에 교회를 세우고 교육하기로 했다.        

한석진 조사는 1897년 가을부터 소 우물에 힘을 쏟았다. 1903년 이미 전도해서 터를 닦은 장천에 가서 교회를 개척했다. 예배당을 지은 후 신의학교(信義學校)를 설립했고 뒤이어 구동학교(球東學校)와 명의여학교(明義女學校)와 신애여학교(信愛女學校)까지 세워서 근방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소학교를 시작하니 이것이 농촌에서 초등교육 기관을 설립한 시초였다. 특히 여학교의 효시라 하겠다. 

이때 채필근의 부친 채응빈과 평양 근방에서 이름이 높은 학자로 예수교인이 된 전군보(田君甫)를 신의학교와 신애 여학교에 청빙했다. 청년들을 전도하여 기독교인이 되게 했으며 애국정신과 독립사상을 불어넣고 교육열을 고취하는 강론과 토론회를 자주 열어 남녀 청년들이 많이 모여서 한석진 조사와 전군보 선생에게 신앙과 애국정신을 지도받았다. 한 조사는 10년 동안 평양 동부 변두리 지역에서 사역했으며 그곳에 일곱 교회를 세웠고, 300여 명이 모이는 소우물 교회에서 장로로 봉직했다. 

1904년 마펫 목사는 이길함, 웰스 의사와 평양 공의회를 조직하고 신학교를 개교했다. 1900년 서울에서 언더우드가 사랑방 신학반을 시작했다. 그것을 인정하여 1904년 학생들을 추천하여 공부하게 됐으며 그해 평양 공의회는 마펫 목사를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장으로 추천하여 초대 교장이 됐다. 처음에는 2년으로 했으나 그 후 계속해서 교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 신학교를 훌륭하게 육성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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