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큰 별(星)이 지다… 춘원의 마지막 길 벽초 홍명희와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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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당신도 이제 별 수 없나봐.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다 하다니.”

그러면서도 허영숙은 못내 감동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마당에서 줄곧 기다리는 리찬 일행들이 빨리 가자고 재촉한다.

“뭘해요!~ 빨리 안가시고? 한 위원장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안무혁 군관이 큰 소리로 재촉했다.

“여보! 제발 몸조심하세요. 약은 꼭 챙겨 먹어요.” 일행을 따라 나서는 남편 춘원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허영숙은 이렇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쓸쓸히 고하고 있었다. “여보 잘 가요!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

허영숙의 눈에서 서글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춘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껌벅거리며 아무 말이 없다. 축 처진 어깨를 약간씩 흔들며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콧등에 걸린 안경을 힘없이 치켜 올리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때는 1950년 7월 25일, 서울의 여름은 몹시 무더웠다. 이렇게 볼품없이 끌려간 춘원은 얼마간 종로경찰서에서 머물다가 인민군이 평양쪽으로 퇴각할 때, 춘원은 자강도 강계 만포군까지 남북 인사들과 함께 끌려 갔다.

이때 춘원은 폐렴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평양이 회복되자 그들은 춘원을 모란봉 서쪽 기림리 반토굴 집에서 잠시 대기시켰다가 가흥리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서 살게 했다. 여기서 춘원은 북한식의 창작을 여러 차례 강요를 받았지만, 춘원은 병칭으로 모두의 강요를 거부했다. 춘원의 지병인 폐결핵이 전란 중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치료까지 못받아 종내는 급성 폐렴으로 번졌다. 이제 살날이 얼마인지 의사들도 점치기 어렵게 되었다.

이곳 가흥리 간이 진료소 의무시설은 너무나 열악하여 춘원의 지병을 임시방편으로도 처방할 길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가흥 진료소에는 30대의 마음씨 좋은 이숙경 간호원이 임시 소장 겸 유일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근처 어디에도 제대로 시설을 갖춘 병원은 한 곳도 없었다. 평양 근교에 가야 겨우 군관련 병원이 한두 개 있을 뿐이다. 모든 병원이 전란이라 어수선 하였고 약품이 절대 부족해 어디를 가든, 정상 치료는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

이런 중에 그래도 춘원은 심한 기침과 고열로 인해 가흥리 인민 아파트에 혼자 놔두지 않고 이 진료소 간이 입원실에서나마 간호를 받게 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선생님! 한 바퀴 돌까요?” 이숙경 간호소장이 씽긋 웃음을 보이며 춘원을 바라보았다. 춘원이 답답해 할 때마다 춘원을 휠체어에 태우곤 가흥진료소 언덕빼기를 한바퀴씩 돌아 주곤 했다.

오늘도 이숙경은 정성을 다해 춘원을 간호하고 있었다. 춘원 선생이 이곳에 끌려 왔다는 소문이 금새 퍼졌을 때, 이숙경 할아버지는 손녀딸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숙경아, 그 분을 잘 모셔라. 그분은 보통 사람 아니다. 조선에서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이야! 어쩌자고 병까지 깊어서…. 아까운 인물인데.”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고향 정주에서 춘원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면서 매우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손녀딸에게 춘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줬다. 이곳 인민학교에서 줄곧 문화반장을 했었고 작가 지망생인 문학도 숙경으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해 주면 고맙고.” 춘원은 자진 돕겠다는 숙경에게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숙경은 휠체어를 끌어다가 기운 없어 잘 걷지 못하는 춘원의 무릎 앞에 갖다 댔다.

피를 토하는 기침을 연속 심하게 할 때는, 옆에 있는 사람들의 혼을 죄다 빼 놓을 정도로 요란을 떠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기침 상태가 조용했다. 춘원은 휘청거리며 휠체어에 올라 탔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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