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큰 별(星)이 지다… 춘원의 마지막 길 벽초 홍명희와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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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지금 이 시는 춘원의 인생고해의 처량한 신세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희망가가 아닌, 절망가로 반전되어 지금 춘원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흥리 리장 박흥식이 숨이 턱에 차서 달려왔다. “이광수 선생님! 손님이 찾아 왔습네다. 아주 높은 사람이 선생님을…” “이곳에서 누가 나를 찾을까?….”

리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찬찬히 바라보니, 시꺼먼 세단에서 더운 여름 날 까만 중절모를 푹 눌러 쓴 사내가 차에서 내려,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도가 없는 언덕을 향해 그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춘원은 물끄러미 그 사내를 응시하며 어디서 많이 본 걸음걸인데…. 모자를 푹 눌러 써, 언뜻 알아볼 수는 없지만….

춘원에게 거의 다가선 신사는 모자를 벗어 앞가슴에 대면서 카랑카랑하게 말했다. “춘원! 오랜만일세! 나 벽초(碧初)야!” 젊은 시절, 동경 유학생 친구, 벽초 홍명희가 이곳 춘원을 찾아온 것이다. 벽초를 알아본 춘원은 반가운 나머지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는 자세를 취하려 하자 벽초는 황급히 붙들어 만류하며 춘원을 도로 그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깊은 포옹을 하며 만남의 기쁨을 나눴다.

지난 날, 사상적으로 걸어가는 길이 달라 한때는 앙숙처럼 대립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만남이 그저 기쁠 뿐이다.

“벽초 형! 간간이 형 소식은 풍문에 듣고 있었지만, 이렇게 소문없이 불쑥 찾아 올 줄은 정말 몰랐어. 반갑네! 얼마만이야? 북조선에서 높은 분을 이렇게 만나다니…. 얼굴은 많이 좋아 보이네만….”

춘원의 말 뒤끝이 슬며시 흐려지고 있었다. 춘원보다 네 살 위이지만, 젊은 청년시절 동경에서 함께 유학하며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던 절친이다. 이때 조선에서는 동경삼재(東京三才)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즉 동경유학생 중에 세 사람의 천재가 있었는데 그들은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그리고 벽초 홍명희를 일컬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찍이 신문에 ‘무정’과 ‘임꺽정’을 연재하면서 조선청년들의 문재(文才)의 능력과 천재성을 만방에 보여주기도 했다.

맑았던 이 날 7월의 오후, 하늘에는 구름들이 모여 그늘을 만들어 주고 시원한 바람이 불지만, 한낮의 더운 열기는 이 산골에도 인정사정없이 무덥다. 

두 사람은 자리를 정자나무 그늘 밑으로 옮기고 나란히 자리를 했다. 그리고 벽초는 눈 아래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강물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시선을 춘원에게로 돌리며 다정스런 목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춘원!” “지금 건강상태는 어느 정도야? 소문에는 중증이라던데…. 솔직히 말해봐!” “솔직히…. 솔직히 말하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가래가 끓어 쇠소리처럼 나는 춘원의 음성은, 정말 인생을 죄다 끝내는 마지막 신음소리처럼 들렸다. 벽초 홍명희는 오늘 김일성의 지시로 이곳에 왔다. 신분은 노동당 군사위원회 중앙위원의 자격으로 왔다. 홍명희는 도수 높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옛날 동경에서처럼 춘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홍명희(洪命憙)는 누구인가. 홍명희(호는 벽초(碧初))는 충북 괴산 출신이다. 1888년 고종 25년 충북 괴산에서 사대부 명문가인 풍산 홍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부친 홍범식이 비분 끝에 자결한 사건은 홍명희로 하여금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벽초는 평생에 걸쳐 ‘반제반일’ 투쟁노선을 견지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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