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창] 아! 50주년 희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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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자는 1977년 2월경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으로서 유신정권에 항의하는 뜻으로 당시 해직교수였던 한신대 안병무 교수에게 전화해 원고청탁을 드렸다. “유 국장! 내가 해직교수인데 괜찮겠어?” “걱정말고 보내주세요” 정보당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공보에 게재했다. 당시 사장이셨던 안광국 목사(증경총회장)에게 정보당국은 편집국장을 내보내라는 압력을 계속 가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안 목사님은 당시 기독공보 명예이사장이셨고, 평소 두터운 교분관계를 가지고 있던 숭실대재단 이사장이셨던 김형남 장로에게 숭실대에 자리를 부탁해 숭실대학신문방송 교지 등을 맡아 전문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고범서 총장의 배려가 컸었다. 맡겨진 일을 감당하면서도 매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개최되는 시국기도회에 참석했다. 몇 달 후 총장실에서 부름을 받아 갔더니 “유 장로! 학교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기도회에 나가지 말라”는 교육부의 압력을 전해주었다. 숭실대 재직 중 보람도 컸지만 고통도 많았었다. 1980년 5.18사태 때는 학생과장을 맡아 운동권 학생들과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 후 홍보부장, 출판부장을 거쳐 재무처장, 재단사무국장을 마지막으로 23년의 숭실대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2000년 2월 16일 은퇴예배를 드리고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장로신보 창간 주역이셨던 김재호 장로님이 전화를 하셨다. “유 장로! 나 좀 만나자”고 해서 그날 오후 3시 지금의 사무실을 찾아뵈니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유 장로 장로신보 폐간된거 알아?” 전혀 관심도 없던 내가 모르겠다고 하니 내 두 손을 덥석 잡더니 “유 장로가 한번 해 보면 어떻냐”고 사정을 하신다. 기자도 은퇴 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터에 허락을 하고 그해 4월부터 편집국장 겸 총무국장으로 열심히 뛰었다. 억대의 빚과 제작비, 직원들의 월급 등 2년 안에 다 청산하고 8페이지 신문을 12면 컬러로 제작하기 시작, 발전에 시동을 걸었고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적극적 후원으로 16면으로 증면되었으며, 김건철 장로가 사장, 남준효 장로가 부사장으로 오면서 오늘의 20면으로 증면하게 되어 교계 언론지로 전장연 산하기관지로서의 역할을 다해왔다.

독자가 2만여 명으로 구독료, 광고수익, 이사회비 등 23년간 일해 오면서 한번도 적자를 내본 적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걸출한 필진들의 옥고가 본지의 위상과 품격을 한껏 높였다. 독자들에게 읽히는 신문으로 거듭나게 했다. 기자는 23년 동안 기쁨과 고난도 많이 있었지만 모략중상하는 무리도 꽤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동안 울면서 기도도 많이 했다. 현역들 뿐 아니라 그간 계준혁, 이흥순, 박래창, 김학진, 김건철, 남준효 장로님들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기자는 지난 23년 간 늘 기도와 헌신, 그리고 섬김과 나눔과 베풂의 삶을 살고자 노력해 왔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며 겸허히 순종의 삶을 살고자 나름대로 힘쓰고  있다. 실무자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있다.

“고난과 은혜로 50년 도약과 소망의 100년”을 달려갈 때라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겸허하고 정직한 교계 언론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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