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기독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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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도시우스(Theodosianus) 황제의 부친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 전공(戰功)을 많이 세운 장군이었다. ‘기병 장관’까지 승진했다.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을 때 행정 장관의 모함에 빠졌다. 적(敵)과 내통하고 있다고 황제에게 고발당했다. 그런데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갑자기 죽었다. 16세가 된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뒤를 이었다. 나이 어린 황제는 역전(歷戰)의 용사, 제국의 공로자 테오도시우스 부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아버지를 잃은 당시 테오도시우스는 29세였다. 2년 후 아버지를 사형시킨 황제가 불렀다. 제국 동방을 맡길 터이니 제국을 재건하는 데 협력해 달라는 것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조건 하나를 내세웠다.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명예 회복이었다. 그라티아누스는 승낙하고 누명(陋名)으로 희생되었다고 공표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속주(屬州) 에스파냐(스페인) 출신이었다. 

12월 7일은 밀라노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축일(祝日)이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의 명문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수도 장관까지 올랐다. 평생 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였다. 아리우스파(Arius, 예수의 신성 부인(神性 否認)) 밑에서 냉대를 받아오던 삼위 일체파가 암브로시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탁월한 정치 지도력으로 갈등을 수습했다. 아직 ‘사제’(司祭)도 아니던 그를 밀라노 주교(主敎)로 선출, 374년 12월 7일 취임했다. 40대 초반이었다. 어거스틴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갑자기 사망했다. 테오도시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첫해에 중병(重病)이 들었다. 데살로니카(Thessalonika)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앓고 있던 병이 깨끗이 나았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신앙심이 깊어졌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8년 원로원에서 연설을 했다. “로마인의 종교로서 그대들은 유피테르(luppiter, 로마의 주신(主神))가 좋다고 보는가? 그리스도가 좋다고 보는가?” 의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그리스도를 선택했다. 로마 제국의 국교(國敎)로 공포했다(AD 39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350여 년 만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 앞에 굴복했다. 30만이 넘는다는 모든 우상의 숭배가 금지되었다. 신상(神像) 파괴령이 내려졌다. 원로원에 있던 승리의 상(像)도 치워졌다. 제우스(Zeus, 로마의 유피테르) 신(神)에게 바쳐지던 올림픽 경기도 금지되었다. 주일은 공휴일이 되었다. 데살로니카(Thessaloniki)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데살로니카의 총독과 많은 행정 관료들이 살해되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민중 폭동으로 단정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혹독하게 진압했다.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7천여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암브로시우스는 항의문을 황제에게 보냈다. 군대 진압이 도(度)를 넘어 잔혹했다는 것이다. ‘황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 공식적으로 속죄하지 않으면 황제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황제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복과 옷에 수놓은 문장(紋章), 머리에 쓰는 왕관, 보석이 새겨진 검(劍) 등을 내려놓고 소박한 차림으로 교회 앞에 서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지도자의 발언이 사회적 양심을 일깨우는 데에 이 정도 권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어려우면 빌리 그래함(B Graham,1948~2018) 같은 목사를 만나, 나라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조언을 구했다. 황제는 제단 앞으로 나아가 주교에게서 빵과 포도주 성체(聖體)를 받았다. 당시 로마 대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겸손을 본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황제도 종이고 양(羊)이다. 그러나 교회는 절제가 부족했다. 이후부터 가톨릭은 지나치게 정치화되어 갔다. 1077년 ‘카놋사(Canossa)의 굴욕’의 출발점이 되었던가! ‘사제의 서임권’을 황제가 가지려다가 교황과 대립,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7세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Heinrich) 4세가 꼬박 사흘 낮밤을 카놋사성 밖, 눈 속에 서 있었던 사건이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세속화, 종교 개혁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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