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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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심 교회 향해… 사업‧봉사 강권적 역사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 시작 이후

여러 가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 돼

주일학교 반사 제안에 나는 바로 “못합니다”라고 거절했다. 나들이옷 한 벌 변변한 것이 없었고 교통비 몇 푼이 모자라 늘 쩔쩔매던 터라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럼에도 전도사님께서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나를 만날 때마다 부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무슨 일이든지 일을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고 서원기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기도는 돈 버는 일자리를 구한 것이지 교회 봉사 일은 아니었어’라고 애써 자기 변명을 하고 외면했지만 점점 마음에 부담이 갔다.

‘돈 버는 일은 일이고 봉사하는 일은 일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떠오르자 스스로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며칠을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모처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르칠 깜냥이 안 되면 허드렛일이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일학교에 나갔다. 그렇게 주일학교 교사로 시작한 교회에서의 봉사는 그 뒤로 장로 은퇴 70세까지 43년간 이어졌다. 이제 돌아보니 하나님께서는 내게 다짐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다. 삶의 중심이 교회를 향하도록, 사업도 봉사도 교회 중심에서 출발하도록 강권적으로 역사하셨던 게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면 만일 교회학교 교사가 아니라 사업을 먼저 시작했다면 삶의 중심을 계속해서 교회에 두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이토록 세세하게 개입해 주셨기 때문에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었다.

또한 교회학교 교사를 하면서 믿음 좋고 훌륭한 선후배,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지성적인 면이나 신앙적인 면에서 사회 경륜이 잘 갖춰진 분들과 교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갑자기 수준 높은 세계로 진입하여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나보다 훨씬 수준 높은 사람들을 만나자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딴 세상을 경험하며 배울 수 있었다. 이후로 생계를 위해 힘들고 거친 밑바닥 일을 하는 와중에도 주일이면 그분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세상은 넓고 희망이 있는 곳’이라는 긍정적 마인드를 다시 얻곤 했다. 그리고 ‘복된 삶’에 대한 꿈을 꾸게 됐다. 그렇게 교회학교 교사 직분은 이후의 내 삶과 사업에 크나큰 영향을 줬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서원기도를 하던 당시만 해도 철저하게 바닥에서 몸부림치던 인생이 그 이후로 서서히 사회의 중심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는 이미 지나갔고 삶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순교자의 아들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사업도, 결혼도, 평생의 신앙생활도 바로 여기서 활기찬 첫 동력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며 움츠리고 기죽어 있던 ‘박래창’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촌장로교회는 이북에서 피난 나온 분들이 세운 곳으로, 그분들의 부모나 친척 중에는 피난 가지 않고 북한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문에 교회 안에는 순교자에 대해 큰 존경을 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주일학교 교사로 처음 들어갔을 때, 같이 봉사하는 분들이 나의 신상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설명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분들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박 선생, 순교자의 아들이셨군요!”

이 말을 들은 내가 더 크게 놀랐다. 아버지께서 구세군 사관(목사)이셨고, 그때문에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해서 돌아가신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순교자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순교자에 대한 개념을 모르기도 했고, 알았더라도 나와 연관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어려서는 유복하게 자란 것 따위 내세워봐야 웃음거리만 될 뿐인, 초라하고 직업도 없는 가난한 청년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내 힘으로 이 현실을 뚫어내야 하고 그 밖에는 달리 아무 방법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자꾸만 의기소침해지고 위축되고 초라해지기만 했다.

그런 때에 들은 “순교자의 아들이셨군요!”라는 말은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아버지께서 내 종아리를 치시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지!” 하고 꾸짖으셨던 일이 퍼뜩 떠올랐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선진 기독교 문화권에 남들보다 먼저 진입한 분들이셨다. 일제강점기 고통스러운 시절에 되도록 여러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려고 애쓰셨다. 분명한 위험이 눈앞에 닥쳐올 때도 굴하지 않고 신념대로 사신 분들이었다.

이런 기억들을 하나씩 곱씹어보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자격지심에서 벗어나서 나 자신을 당당한 존재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도 나는 ‘순교자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일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찾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신촌장로교회에서 여러 분야 훌륭한 분들과 수평적으로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는 데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날 이후로 모두 나를 챙겨주고 각별히 관심을 가져줬다. 크게 한 일이 없는데도 애썼다면서 밥을 사주시는 분들, 작은 일을 해내도 박수 쳐주는 분들,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웃으며 반응해 주는 분들 덕분에 서서히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성가대, 남선교회 등 여러 조직 활동에 참여하자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술이 나날이 발전돼 갔다. 그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교회에서 많은 새로운 일들의 중심에 섰다. 교계의 지도자급인 분들,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분들과도 수평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인생의 새로운 무대가 열린 셈이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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