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선교] ‘전근대 한국행형사’ 상고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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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선교를 진행하며 ‘월간교정-교정 포커스’에 게재된 교도소연구소 금용명 소장의 논문을 접하고 이를 참조 및 재구성해 서술한다. 여기서 상고사는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를 다룬다. 한국행형사의 역사를 톺아보고 돌아보며 참고 및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감옥 설비가 나타난 것이 언제 무렵이었는가에 대해 한반도에서 출판된 역사책 상으로는 이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부여족이 생활하고 있었던 지방 지금의 만주(滿洲), 장춘(長春), 길림(吉林) 지방에서는 ‘형벌은 엄격하고 긴급하게 실행한다. 주벌(誌罰)을 당한 자가 있으면 집안사람을 모두 몰입(沒人)하여 노비로 삼고, 남의 물건을 훔치면 훔친 물건의 12배를 갚도록 하며, 남녀가 간음하면 모두 죽이고, 투기(細忌)하는 부인을 더욱 엄하게 다스려 죽인 뒤에 산 위에 시체를 버린다’, ‘형벌은 엄격하고 긴급하게 실행한다.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집안사람을 모두 몰입하여 노비로 삼는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훔친 물건의 12배를 갚도록 한다. 남녀가 간음하거나 부인이 질투하면 모두 죽인다. 특히 질투하는 것을 미워하여, 죽인 뒤에는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에 버려 썩게 한다’라고 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형률(刑律)이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에서,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행형시설에 해당하는 감옥도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은(殷)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에서 대회를 열고, 연일 음식을 먹고 노래와 춤을 추었는데 이름하여 영고(迎鼓)라 했다. 이때에는 옥(獄)을 열어 죄수를 석방시켰다’라고 하는 기록만 보더라도 죄수를 구금하는 장소가 있었던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에 더해서 ‘사방이 2천 리이고 호구(戶口)가 8만이며 그곳 백성들은 정착생활을 하였고 궁실, 창고, 감옥이 있다’, ‘원책(圓柵)을 성으로 삼고 궁실, 창고, 감옥이 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기록도 있어, 감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다 더 명확하게 하고 있다. 부여족에 대해서는 그 종족이 아직 한반도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감옥 설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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