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병조 목사 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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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 목사 망명 후 귀국… 일제하 고난

해방 후 북한에 남아 반공 지하운동 펼쳐

더욱 사회주의 러시아와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정서가 확대되면서 한인 기독교 공동체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김병조 목사가 오랜 망명을 접고 귀국을 모색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3·1 만세운동 주동자 기소 시효인 10년이 지났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심도 작용했다.

마침내 1933년 4월, 김병조는 1919년 3월 25일 밤 만세운동을 뒤로 하고 압록강을 건넌 지 15년 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정차한 신의주역에서 일본에 협력하라는 자술서 작성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해 요시찰인의 신분이 되었다.

귀국 후 김병조는 고향인 정주가 아닌 평북 용천군 양서면 동평동에 정착한 뒤 신서, 북평, 동상교회 등을 돌며 시무했다. 세 교회 모두 3·1 독립운동 당시 김병조가 잠행했던 곳으로, 지금껏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특히 동상교회는 상해 시절 함께했던 송병조 목사의 모 교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 후 요시찰인 김병조의 목회활동에는 감시와 제약이 뒤따랐다. 30리 이상 거리 이동은 주재소 신고 후에 가능했고, 부흥회나 집회에도 감시가 뒤따랐다.

엄혹했던 일제 말기 1938년 9월 9일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가결한 뒤 교계 지도자들이 먼저 실천에 옮겼다. 30리 밖 이동제한으로 총회 참석이 불가능했던 김병조 목사는 총회 결정에 절망했고, 1941년 용천군 동상교회를 사임한 뒤 목회 현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 후 김병조 목사는 5년간 머물렀던 용천을 떠나 고향인 평북 정주로 돌아와 덕언면 덕흥동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덕흥동은 3·1 만세운동의 동지였던 이명룡 장로가 은거 중이던 곳으로 김병조 목사를 불러들인 것인데, 이곳에서 그는 해방될 때까지 《한국 독립운동 사략》 하권 집필에 몰두했다.

해방 후 비밀 반공 광복단(反共 光復團)과 마지막 유형(流刑)(1945~1946)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감격스러운 해방이 찾아왔으나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은 한반도를 분단의 새 역사로 몰아넣었다.

해방공간에서 김병조 목사는 민족대표 33인이자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경력이 작용해 소련 군정으로부터 조만식과 더불어 원로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건국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조만식과 달리 김병조 목사는 정치 운동으로는 공산주의에 이용당할 염려가 있었다. 조만식이 소련 군정에 정면 대응할 방편으로 조선민주당 창당을 준비하자 김병조 목사도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나, 자신은 정치를 떠나 지하 비밀운동과 교계 중심의 민족통일 운동을 전개했다.

소련군 주도하에 북한이 사회주의체제로 변화해 가자 이에 조응하기 어려웠던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미 군정이 있는 남한으로 월남했다. 특히 한경직, 윤하영 등 교계 지도자들의 월남이 많아지자 김병조 목사는 “목사들이 전부 남하하면 북한교회는 누가 지키느냐? 다 늙은 목숨이니 나라도 남아 지키겠다” 하며 북한에 남았다.

이후 김병조 목사는 정주군 마산면 청정교회를 시무하는 한편, 지하 비밀결사대인 ‘반공 광복단’(反共 光復團)을 조직해 신탁 통치 반대 운동 등 반소, 반공 운동을 전개했다. 김병조 목사가 조직한 반공 광복단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주는 자료는 아직 없다. 다만 당시 활동했던 인물의 증언에 의하면 교회 조직을 중심으로 장로, 집사, 청년들을 모아 결사대를 만들고, 각 지역 교회 조직들로 확대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 제대 출신으로 비밀조직에 참여했던 이영호(가명)의 증언에 의하면 반공 광복단은 각 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점조직 형태로 조직을 시도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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