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한경희 목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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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부름까지, 한경희의 회심과 헌신

서북에서 만주를 누빈 초기 한국인의 선교

한경희(韓敬嬉)는 1881년 11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남시리에서 권세를 부리던 한승주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에게 수탈을 당해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4세인 1885년 가족들이 양서면(楊西面)으로 이사를 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수재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6세 때 서당에 다니게 되었으나 일곱 살 때 부친의 사망으로 그것마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의주에서 장사를 시작한 형들 덕분에 형편이 풀리기도 했으나 청일전쟁으로 의주 전체가 폐허가 되면서 다시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평안도 북부 일대를 전전하며 가족과 함께 극도로 힘들게 지낸 한경희는 19세가 되던 1900년 신효정의 장녀 경원(敬元)과 결혼했다.

갑자기 평민으로 전락하자 한경희를 포함한 형제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술 취함과 생활의 방탕함이 극에 달했다. 특히 후일 목사가 된 이봉태를 비롯해 기독교를 전도하는 이들을 마구 구타하기도 했고, 신자들을 박해까지 해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비난도 받았다. 그들은 유명한 싸움꾼으로 악명을 떨쳤다.

서양의 전도인을 보면 행패를 부리고 싶어 안달난 한경희는 1903년에 동문밖교회 전도인으로 후에 목사가 된 송문정의 전도를 받았다. 그가 준 <구세론>을 읽다가 성령의 역사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첫 주일부터 예배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그의 생활은 전적으로 변했다. 그동안의 방탕한 생활이 죄란 것을 깨달았다. 지은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가족과 이웃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니 가문에서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성경 읽기와 기도로 시련을 참아냈다. 마침내 그렇게 핍박하던 맏형 한찬희도 나중에 회개하고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는 3개의 교회를 개척한 열성파였다. 1903년 기독교에 입교했고, 그 후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

한경희는 23세가 되던 1904년 6월 22일 동문밖교회에서 부부가 학습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05년 11월 16일 이 교회에서 선교사 계인수(Carl E. Kearns, 桂仁秀) 목사에게 부부가 함께 세례를 받고 동시에 집사로 피택되었다. 이후 그와 함께 많은 전도여행을 했다.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간증을 해 청중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 지역에 큰 어려움이 있었으나 한경희의 전도는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목사는 드물어 지역교회를 순회해야 하기에 교인 가운데 교회를 인도할 이를 뽑아 영수라는 직책을 주었다. 그는 1907년 7월 동문외교회의 영수로 선출되어 시무하게 되었다.

그는 1906년부터 평북 용천과 서간도 지역을 오가며 전도를 했는데, 이때부터 국외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학문이 교회를 이끌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해 1907년 7월 창신학교 속성과에 입학해 6개월 만에 졸업했고, 이듬해인 1908년에는 오히려 학교 직원들과 인근 주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고향인 의주와 평안도 일대에 어느 정도 그 성과가 나타나자 1909년부터 한경희는 당시 동포들이 모진 고난 속에서도 이주해 살던 만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낯선 땅으로 이주한 그는 고초 속에서도 마침내 홀루투(葫薦套)와 자피구(夾彼溝) 두 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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