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일요일 아침도 여전히 좀 늦은 아침을 먹고 정원이 내다보이는 안방 앞 마루에 온 식구가 모여 앉았다. 아버지는 등의자에 앉으셨고 여느 때처럼 나는 아버지 무릎 앞에 기대앉아 아버지와 손을 맞잡고 앉아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서울 중구 저동 우리집 풍경이다.
그러는 중에 누군가가 방송 좀 들어보시라며 아버지께 다가갔다. 새벽에 북괴군이 38선을 넘어 남으로 침범했고 군인들은 즉각 귀대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되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동요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있었나보다는 정도로 알고 무심히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고향 김제에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셨다가 참패하고 1주일 전에 잠시 상경하신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모으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9살배기인 나는 그것이 평화로운 일요일로는 마지막이 될 줄 꿈에도 상상 못했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 일하는 언니가 뛰어 들어오며 큰 대문 안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물을 좀 달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북괴가 쳐내려와 피난 짐을 싸고 내려오는 중이라며 물 좀 주시고 이 댁도 빨리 피난 짐을 꾸려 떠나라는 말들을 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어머니에게 나가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서둘러 밖에 나갔다 오시더니 빨리 밥을 안쳐서 저분들 요기부터 시키라고 지시했다. 새벽에 총소리에 놀라 밥도 못 먹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도망쳐 나왔다는 그들은 북괴가 쫓아오기 전에 한강을 건너야 하니 밥 먹을 시간이 없다며 이 댁도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떠나자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어디 가도 밥은 먹어야 하니 요기하고 떠나라고 만류하며 서둘렀다.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참 정치하기 힘들다. 백성이 저렇게 나라의 말을 안 들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며 조금 전 나라의 방송을 믿지 않는 국민들의 의식을 걱정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에 갇혔고 아버지는 납북당했다. 요새 중동이 심상치 않아 걱정이다.
오경자 권사
신일교회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