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3·1운동 이끈 남궁혁과 김마리아 일가
김마리아의 항일 투쟁과 애국부인회 활동
1917년에는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광주 양림교회를 시무했다. 그는 신학교 입학 전 광주 숭일중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을 때 영어 실력이 뛰어나 젊은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남궁혁이 평양장로회신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마침 방학 중에 광주에 머물러 있던 남궁혁은 이 일을 주도했다. 남궁혁은 자신의 집 앞에서 양림동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 광주시는 사회단체의 제안으로 남궁혁을 기리는 조형물을 설치해 오는 세대에 3·1 정신을 전하고 있다.
김마리아는 동경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형부인 남궁혁 목사와 언니 김함라와 함께 광주에서 만세운동 준비를 하는 등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거사를 촉구했고, 3월 10일에 폭발해 4월 8일까지 이어진 광주 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경성에서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이 전라도 광주에서는 3월 10일부터 4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양림동 기독교인과 비밀 독서모임이었던 신문잡지 종람소 회원인 젊은 지식인들이 준비했고 숭일학교, 수피아학교, 농업학교 학생들, 지산면 일곡과 생룡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참여한 대규모 독립 만세시위였다. 남궁혁, 김함라, 김마리아, 김필례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경성 출신 남궁혁의 부인인 황해도 출신 김함라는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불리며 2019년 2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마리아와 친자매였다. 황해도에서 광주로 시집온 김필례는 김함라와 김마리아의 종고모(從姑母)로, 최흥종의 동생 최영욱의 부인이었다.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는 동경에서 부산을 경유해서 언니 김함라와 김필례가 사는 광주에 2월 중순 도착했다. 이때 광주에는 동경유학생 정광호가 귀국해 서울에서 인쇄한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있었다. 《광주제일교회 110년의 발자취》에는 “김마리아가 광주로 가져와 종고모인 김필례에게 전달했고, 김필례는 남편 최영욱의 서석병원 지하실에서 그것을 복사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광주 3·1 만세운동에 정광호와 함께 동경에서 활동했던 김마리아도 협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주 3·1 운동 전에 김마리아는 수피아학교의 교사로 있던 김함라와 김필례의 주선으로 교직자와 간호원들을 초대해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그런 다음 2월 21일에는 서울로 가서 황애덕(黃愛德), 박인덕(朴仁德), 신준려(申俊勵) 등을 만나 동경 2·8 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하면서 여성 독립운동의 전개 문제를 논의했다.
교육계, 천도교계의 지도자들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3·1 독립운동이 발발한 날에도 황해도 봉산(鳳山)과 신천(信川) 등지를 돌며 지방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3월 5일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남대문역 앞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가 학생들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김마리아는 경무 총감부에서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 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6개월 동안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이를 이겨내고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서울, 대구를 비롯해 부산, 전주, 진주, 평양, 원산 등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2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 수합 활동을 벌여 6천 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