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낙동강 안동호를 따라 떠나는 자전거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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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내 인생의 한켠을 늘 함께해 온 벗이다. 다섯 살 때 다리에 장애가 생겨 남들처럼 쉽게 탈 수 없었던 자전거를, 대학 시절 휴교령이 내려졌던 어느 날 비로소 익혔다. 그 후 시내까지 이어진 30여 리 비포장 신작로를 일주일에 한 번씩 오가며 땅고개재와 청머리재 미루나무 아래에서 쉬어가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야간 강의를 마치고 자전거로 집으로 돌아오던 시절,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던 학생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 뒤로는 밤길 자전거 타기를 거의 멈추었다. 반사빛에 시야가 가려지는 사고 위험 때문이다. 시내를 나갈 때면 언제나 조금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우회도로를 선택한다. 몇 해 전, 2월 끝자락 안막재를 오르다 갑작스러운 폭설을 만났을 때는, 후배가 트럭을 끌고 와 자전거와 나를 함께 실어 귀가했던 일도 있다. 자전거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이 바로 주변의 지인들, 필자에게는 ‘119’나 다름없다.

최근에는 안동댐 물박물관에서 부산까지 이어진 국토종주 낙동강 자전길에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알고 지내던 교수님이 대학원 제자와 함께 부산까지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뜨거워졌다. 몇 해 전 지속가능발전대학에서 ‘자전거 환경캠페인’을 했던 기억도 내 등을 떠밀었다.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이 떠올랐다. 작가는 책 머리말에서 “이 책을 팔아 새 자전거 월부값을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라고 넉살을 부리며 글을 시작한다. 그의 자전거가 안동에 머물렀을 때, 퇴계 선생과 도산서원에 대해 쓴 대목이 특히 가슴에 남는다.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의 단출한 집. 한옥이 건축물로 성립될 수 있는 최소의 조건.”

선인의 검소함 앞에서 작가가 느낀 경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퇴계 선생의 삶은 더욱 외려 깊다. 벽에 기대지 않고 앉고, 음식을 먹을 때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반찬은 세 가지를 넘기지 않았다. 병이 깊어졌을 때에는 빌려온 책을 조용히 돌려보내고, 검소한 장례를 일러두고, 사랑하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 당부한 뒤 생을 마쳤다. 군더더기 없이 오직 본질만 남긴 삶이었다.

김훈 작가는 또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전국 산천을 자전거로 누빌 때 만난 노인들은 교육도 권력도 없었지만 세상의 이치를 환히 꿰뚫고 있었다. 한 생애의 고되고 순결한 노동이 그들에게 배움의 은총을 베풀었다.”

그 말처럼, 노인의 얼굴은 그가 걸어온 삶의 지도이며 궤적이었다.

자전거를 끌고 돌아오는 길, 필자는 다시 안동호의 고갯길과 산야를 지나게 될 것이다. 배롱나무꽃 흐드러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산골에서 100마지기 논과 1만 평 자두밭을 일구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지난 가뭄의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 들깨 밭을 갈아주겠다며 트랙터를 몰고 20여 리를 달려왔던 친구의 얼굴도 생각난다.

“친구야, 이제 영농 규모 좀 줄이고 자주 보며 살자.”

농사꾼의 우정은 이렇게 흙냄새와 땀 냄새 속에 배어 있다.

농업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다. 나라를 지탱하는 공공재적 기능을 가진다. 농약 중독, 병충해, 가격 폭락 속에서 몸과 마음이 병드는 현실은 일종의 산업재해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쿠즈네츠가 “농업을 소홀히 해도 중진국까지는 갈 수 있으나 선진국은 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계절이 바뀔 때면 문득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이육사. 안동호 상류 도산 원천에 자리한 이육사 박물관을 찾을 때마다, 유년을 이곳에서 보냈던 시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박물관 뒤편 묘소에 서면 흐르는 낙동강 물결과 함께 그의 한 줄 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비록 지금은 다른 계절을 지나고 있지만, 이 시 한 편은 언제 읽어도 마음을 맑게 하는 힘이 있다. 고달픈 몸으로 청포 입고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던 시인의 마음이, 낙동강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다시금 깨어난다.

조상인 장로

<안동 지내교회, 고암경제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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