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청빈(淸貧)과 청부(淸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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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경제 기적을 함께 이루었다.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이제는 그 정점을 지나 정체기에 들어선 반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스러운 고난을 딛고 아시아에서 두 번째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두 나라는 같은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의 높은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고 강한 교육열과 근면 성실의 정신을 바탕으로 매우 유사한 발전 경로를 걸었다. 

그러나 두 나라 국민의 가치관과 심성은 크게 다르다. 우리는 그 차이를 두 나라의 미의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청빈의 정신이 체화된 ‘와비사비’라고 하는 미의식의 나라라고 한다면, 한국의 미의식은 신명과 해학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청빈의 정신이 깊이 뿌리내려왔다. 겉치레보다는 본질에 집중하며 물질적인 욕망을 멀리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미덕으로 여기는 정신이다. 이 정신이 현대 일본인의 삶에 체화된 미의식이 와비사비이다. 와비사비는 불완전함, 덧없음, 단순함 속에서 진정한 이름다움을 발견하는 일본의 전통 미학을 표현한다. 여기서 ‘와비’는 물질적인 부족함이나 검소함을, ‘사비’는 세월의 흔적과 고요한 깊이를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일본 다도를 창시한 승려 센노리큐의 이른바 와비차는 이러한 정신을 일본의 전통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값비싼 중국 도자기가 아니라 투박하고 불완전한 조선의 막사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물질적 빈곤에서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삶의 태도를 추구했다. 가난하고 절제하는 생활에서 내면의 고요함과 자유를 얻는 미적 실천을 지향한 것이었다. 

청빈을 추구하는 정서가 근검절약과 높은 저축률로 이어지고 경제성장에 필요한 투자의 기반이 되었으며, 사물의 내구성과 기능을 중시하는 와비사비 정신이 정밀한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고, 정성을 쏟아 물건을 만드는 장인정신이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지금은 극심한 침체에 시달리고 새로운 혁신의 시대에 길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은 역설적으로 청빈의 정신과 와비사비의 정서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국에도 가난을 숭상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의 선비정신은 가난에도 굴하지 않는 기개와 물질보다는 높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 중국과 같이 거대하고 화려한 것보다 소박하고 단순하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본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부와 풍요를 본질적으로 멀리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부와 풍요를 함께 나누고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신명나는 놀이로 삶을 승화시키고자 했다. 고난과 빈곤과 억압을 해학으로 이겨내는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신명과 해학이 있는 한국인에게는 빈곤을 즐기고 그 안에 머무르는 청빈보다는 부와 풍요를 추구하되 함께 나누는 깨끗한 부, 즉 청부(淸富)의 정신이 더 친근하지 않을까 한다.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직면해서 활력을 잃고 정체기에 들어선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신명과 해학의 정신으로 혁신을 이루어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열게 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는 이때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누는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세계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청빈과 청부의 정신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청부의 정신이야말로 변화와 도전의 시대에 꼭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한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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