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집 『봄비를 맞다』를 읽다가 문득 나도 이런 스타일의 시를 써보고 싶어졌다. 시를 쓰는데 무슨 학습이나 훈련이 필요하겠는가.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끄적이면 되는 거지 하는 담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느 토요일, 선배장로님의 문상을 하러 분당 서울대병원을 향해 김포 집을 나섰다. 골드라인 운양역에서 열차에 올라 김포공항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 다시 강남 신논현역에서 또 한번 환승해 분당 미금역에서 하차. 병원 안내문대로 2번출구 앞에서 지선버스를 기다렸다. 차에 오르고 얼마 안가 서울대병원 쪽으로 우회전 하나 했더니 버스는 그냥 직진을 한다. 잘못 탔나 싶었지만 마을버스가 가면 얼마나 가겠나, 눌러앉아 있기로 했는데 차는 계속 전진한다. 운전기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차 서울대병원 안 갑니까? 잘못 타셨어요, 병원에서 나가는 찹니다. 다음에 내려 건너편에서 같은 번호 버스를 타세요. 아니, 틀림없이 안내문에 타라는 데서 차를 탔는데! 다른 승객들은 아무 말 없이 잘 오르고 내리고 하는 걸 보니 잘못을 저지른 건 나 혼자 뿐.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반대방향 버스를 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 한참만에 서울대병원에 도착했다. 아마도 한 시간은 족히 허비했을 터. 언덕길을 걸어 올라 장례식장에 이르러 방명록에 이름 석자 올리고 부의를 전하고 분향하고 나서 비로소 상주의 손잡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150리 먼 길, 전철 셋을 바꿔가며 달려온 끝에 버스를 거꾸로 탄 자책감이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을 훼방하네.
내 글이 여러 사람과 공유할 만한 시가 되려면 어떤 요소를 갖춰야 할까? 첫째 언어가 아름다워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 감동을 일으키거나 교훈 같은 무엇을 담고 있거나 해서 독자가 되풀이 읽어 한 줄, 한 줄 외우고 싶을 만한 것이래야 하겠지. 우리 또래 황동규나 마종기 시인의 글들은 이런 무게가 실려 있기에 내가 감히 이 따위 실패담을 가지고 흉내나 낼 수 있을 소냐!
하지만 최근 미국 Washington Post 신문에 Si Liberman이라는 101세 노인이 기고한 글에 “장수하려면 계속 무언가 글을 써라”하는 대목이 있어 용기를 내게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정신의 집중을 요하지만 육체적 에너지의 소모는 비교적 미미하다. 나의 삶을 – 비록 역사적 사건의 한조각이 아닌 하찮은 일상에 불과하더라도 – 일기 삼아, 기왕이면 시로써 기록하면 가히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들은 3년 동안 예수를 따르면서 구세주의 말씀과 행적을 그들의 기억 속에만 두지 않고 시시로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겼고 이것들이 예수의 사후 복음서로 정리되어 인류구원의 원동력이 되었다. 황동규 교수의 시를 다시 읽는다.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면서.
김명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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