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Guest, Visitor)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眷屬)이라.”고 말한다. 영적으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은 이스라엘과 차별이 없다.
범죄한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남왕국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다.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적은 수(數)만 살아 남았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방인들로부터 부르셨다. 하늘의 시민권이 없던 수많은 이방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유대인 가운데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택함 받은 자들뿐이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本)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이스라엘 대다수 사람들이 불신하며, 믿는 이스라엘인은 소수라는 사실이다.
“의(義)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교도들은 대부분 경건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멋대로 살며 하나님과 선(善)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과 쾌락을 사랑한다. 불구하고 이교도들은 그들이 추구하지 않았던 구원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매우 강하게 역사(役事)하사 그들이 믿음으로 그것을 붙잡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악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義)에 이르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자신들의 어리석음 탓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망을 거두지 않으신다.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愚鈍)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거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기” 때문이다.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지위를 얻을 수 있다면 십자가는 불필요하다. 우리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굳이 죽으셔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삶의 기호(記號)로 삼으며 그 위에 우리의 삶을 건축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 반석이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된다. 이스라엘은 교만해 ‘십자가의 부딪칠 것’에 부딪쳤다. 그들은 행위로 말미암는 율법적인 의(義)를 추구했다.
이스라엘의 불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약속에 신실하지 못하시기 때문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당하게 비난하시거나 책임을 지우시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따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과 예언에 따라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시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그들의 교만 탓이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을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이라고 부른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