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생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당시에 마재마을이라고 불렀던 곳으로, 현재의 생가 건물은 1925년 대홍수로 생가가 소실된 후 원래보다 약간 안쪽으로 복원된 것이라 한다. 원래는 강변에 위치해 집 앞까지 강물이 넘나드는 집이었다고 한다. 다산은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과거시험에 급제한 후에도 서울에 살면서 자주 고향을 찾았다. 유배가 해제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생가에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내걸고 73세에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팔당대교를 건너 6번 도로를 타면 바로 다산 생가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양평 두물머리보다 더 서울에 가까운 곳이지만 비교적 덜 알려져서 그런지 여유롭고 한적한 분위기가 좋다. 강변으로는 다산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정약용유적지 일대에는 생가와 묘소, 정약용기념관과 실학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서울 강남에서 3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우리나라 근세사의 위대한 인물의 자취를 살펴보면서 한강변의 아름다운 경치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보기 드문 명소라 하겠다.
강변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정말 일품이다. 팔당댐으로 흐름이 막혀 있어서 마치 큰 호수와 같이 강물이 잔잔히 흐르고, 건너편으로는 퇴촌의 산들이 겹겹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 이곳에서 배를 타고 앞에 있는 섬을 오가며 고기잡이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그는 고향마을을 묘사하는 수많은 글과 시를 남겼는데, 뒤로는 운길산 줄기가 내려오고 호수같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비단결 같다고 했고, 밤이며 강에 띄운 고기잡이배의 불빛이 물결에 비치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했다. 또 봄에는 산자락으로 진달래가 비치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 다니는 풍경을 정겹게 그려내었다.
정약용이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도 이 강물 위에서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22세이던 1784년 4월 마재마을에서 형제들과 함께 서울로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에 이벽이 천주학에 대해 신나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었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지 등에 관한 천주교의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그의 표현대로 ‘멍하고 놀라고 의심스러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쩌자는 거야? 라고 말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벽의 확신에 찬 말과 행동에 호기심이 생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서울로 돌아온 직후 『천주실의』 등의 책을 구해 읽고 나서는 ‘비로소 기쁘게 마음이 기울어 그리로 향하였다’라고 한다. 그렇게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천주교에 입문했고 강학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지면서 활동했다. 정약용은 그해 9월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세례명까지 받았다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사건으로 유배되기 전후를 통틀어 평생 한 번도 천주교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서 기존의 유교적 사회질서 안에 머물면서도 마음속으로 새로운 신앙과 세계관에 대해 동경을 가졌던 그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겉으로는 평생 유학자로 머물러 있었지만, 그의 학문세계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크게 달라진 것을 목민심서나 중용 해석 등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생가 앞으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기독교가 조선 말 당대 최고 지식인의 마음을 어떻게 흔들어 놓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일 것이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