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5)
구미에서 상주까지 (3)
구미에서 상주까지 가기 위해 우선 낙동을 목표로 삼아 걸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 혹 이런저런 복잡한 일상에 좌절하고 마음이 아파올 때 배위량이 걷고 또 걸었던 낙동강 길을 따라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한번 걸어 보면 그것은 굉장히 잘한 결정이 되리라고 본다. 물론 이 길은 끝없이 펼쳐진 평지길이라 쉽게 지친다. 힘든 길이다. 그래도 낙동강을 벗삼아 걷는 즐거움도 크다.
길을 걸어 본 사람은 길을 걷는 나그네가 되어야만 그때 비로소 찾고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집을 나온 모든 사람은 알 것이다. 집을 나와 나그네의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보다 ‘나그네’란 말이 함유하고 있는 절실함을 더욱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집을 나선 사람을 ‘나그네’라고 한다. 나그네는 집을 떠나 길을 가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외워 둔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란 시가 생각이 난다.
나그네(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은 나그네를 표현하는 말 중에서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무언가 그리움에 몸부림치는 고독한 존재로 묘사한다. 왜 그는 나그네를 말하면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가는 나그네’란 말로 서술했을까? 목월은 왜 인생을 그토록 고독한 눈으로 보았을까? “나그네”란 시에서 목월은 ‘나그네’란 단어를 통하여 인간 내면 깊숙이 침잠해 있는 삶의 허무를 드러낸다. 동시에 그는 ‘길을 가는 나그네’란 말을 통하여 ‘기다림’을 안고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를 아스라이 저 멀리 있는 ‘그리움’과 ‘희망’과 대비시켜 인간 존재를 목가적인 시각으로 묘사한다. 목월은 ‘남도’란 말 속에서 마음속에 숨겨둔 도원(桃源: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가상의 파라다이스), 즉 자신의 이상향(理想鄕)을 드러낸다. 남도를 찾아 가는 나그네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관조(觀照)한다. 그런데 남도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삼백리 길이다. 목월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다 녹여서 ‘삼백리’로 압축한다. 나그네는 그래도 가야 한다.
목월의 “나그네”란 시에서 백미는 단연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이다. ‘외줄기 길’은 한 길이다. 그 길은 돌고 도는 길이지만, 결국은 외줄기 한 길이다. 허망함 속에 목적없이 사는 듯한 착각 속에서 낙심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살아갈 때도 있고, 세상의 온갖 길을 돌고 돌았지만, 결국은 외줄기 길을 가는 것인 인간이다.
목월은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라는 것을 다시 인식하면서 이 말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신앙세계를 드러낸다. 삶이란 인고(忍苦)의 시간이다. 그래서 목월은 나그네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 같다. 목월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목월은 이 시에서 ‘남도’와 함께 ‘삼백 리’란 언어를 선택하여 ‘남도’를 향해 가는 나그네를 아픈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 길은 “타는 저녁놀”이란 말 속에 드러나듯이 희망의 길이다. 외줄기 삼백리 길이지만, 희망을 가질 때 분명한 목적이 나타난다.
길 떠난 사람은 산비탈에 서 있는 나무와도 대화하며 걷고, 나풀거리며 이 꽃 저 꽃 찾아다니는 나비와도 이야기 하면서 걷는다. 때때로 밀려오는 적막감 속에서 외로워지기도 하고 길이 주는 고단함 속에서 어서어서 잠자리를 찾아가서 누워 쉬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바삐 걷기도 한다.
갈 길이 다르고 길을 가는 목적과 방향이 다른 나그네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옛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하고 초등학교 시절의 아스라한 추억이 스멀스멀 찾아와 그리움 가득한 마음으로 걸어가면서 동화 속으로 들어가 동키호테가 되기도 하고 홍길동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온 세상의 중심인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그런데 길을 나서게 되면 자연 속에 비쳐지는 자신이 오직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
언젠가 구미에서 상주 낙동까지 걸어서 갈 생각으로 대구에서 구미로 찾아 갔다. 그런데 그날은 무언가 일이 있어 그 일을 마무리하고 온다고 새벽에 집을 나서지 못하고 아침에 집을 나섰다. 구미에서 상주 낙동과 의성 단촌을 연결하는 낙단보까지 걸어 갈 때 10시간 정도의 시간을 잡는다면 걸어가면서 좀 쉬기도 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날은 그렇지 못했다. 늦게 출발했기에 저녁 늦은 시간에라도 도착해야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바쁘게 걸었다. 뚝방 길을 따라 낙동강 상류를 거슬러 계속 쭉 걸어갔다. 구미에서 상주 낙동까지의 길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힘들고 어려운 길이 없다. 그런데 힘든 길은 없지만, 매우 힘들다. 가도 가도 꼭 같고 끝이 없이 이어지는 단조로운 같은 길을 계속 걸어야 할 때 쉽게 생각했던 생각의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가야만 하는 길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제방길이 나타난다. 쉽게 지친다.
그날 필자는 그 단조로운 낙동강 제방 길을 걸어가면서 나그네 길의 고단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너무 힘든 일도 힘들지만, 단조로운 인생사에 쉽게 지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그런데 그런 고단함 속에서 머리를 파고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고단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겪게 되는 고단함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가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인간은 혼자 몸부림치면서 고단함과 싸우며 자신이 원하는 어떤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과의 인간관계나 원하지 않게 부딪친 일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안고 사는 일도 허다하게 많다. 인간사의 거의 모든 일은 이 두 범주 안에 있다. 어떤 일 앞에서 혼자 외로워하면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삶에 대한 숙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 숙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는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길에는 정해진 정답도 없고 완벽함도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주어진 대로 막연하게만 살아간다면 정말 답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답이 없는 삶을 두서없이 살다보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민폐만 끼치게 된다. 요즘음 뉴스에 40-50대 자녀가 70-80대 부모에게 기대어 살면서 용돈을 안 준다고 행패를 부린다는 보도가 가끔 나온다. 현실 속에서 없어지지 않고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런저런 사건들을 보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정답을 정확하게 모르고 정답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존재이다. 아담 이후부터 그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일어나지 않으면 좋았겠다싶은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다. 그것이 인간 삶의 현장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이 없는 세상을 살면서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면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모든 이들의 과제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왕족이든 평민이든 한 가지 이상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인간의 틀 속에 살아가는 존재는 아무도 완벽한 존재는 없다. 아무도 천사가 될 수는 없다.
아무도 완벽하지 못하다. 하지만 인간은 한계의 틀 속에 살면서도 내일을 꿈꿀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굴레를 벗고 자유할 수 있는 길이다. 이것이 참된 행복의 씨앗이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겨울은 여전히 춥다. 하지만 모질고 악착같은 겨울도 봄이 오면 물러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의 철칙이다. 모질고 힘든 겨울도 봄이 오면 물러간다. 가장 추운 겨울에도 동백꽃은 빠알간 꽃을 피우고 설중매는 눈 속에서도 꽃 몽우리를 터뜨린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