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날개 찢긴 들오리 한 마리 ②
매월 생일 축하로 즐거운 시간가져
생일 탄생시켜준 제2의 부모 노릇
하나님께 진실된 기도 이뤄주심
아이들 표정 밝고 기쁜 모습 놀라워
나의 생일도 바로 이렇게 해서 10월 13일로 정해졌으며, 현재의 내 호적에도 그렇게 등록되어 있다.
매월 우리들은 생일 축하 파티를 가졌다. 그것은 월말에 실시되는 생일잔치로 그 달 안에 생일이 들어 있는 모든 원아들은 그날 아침만은 쌀밥을 먹고 사과나 혹은 과자로 선물을 받으며 나머지 원아들의 환영을 받는 그런 즐거운 시간이 있었다. 아무 선물도 받지 못하는 나머지 원아들은 박수로써 그들의 생일을 축하해 주며, 생일을 맞은 원아는 그 선물을 친한 아이들과 함께 나눠먹는 그런 아름다운 날을 우리들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
‘우리의 생일을 기억해 주신 분.’ 이런 표현으로 황 목사님을 잊지 못하는 우리 형제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것은 생일 없는 소년들에게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생일을 탄생시켜 준 제2의 부모 노릇을 그는 망설임 없이 기꺼이 응해 주신 까닭이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라.’
황광은 목사님은 늘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그 가장 대표되는 예는 난지도교회 앞에 커다란 종을 달기 위한 새벽 기도회였다. 주일 예배 시간에 종 달기 새벽 기도회를 하시겠다는 그의 말을 우리는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신념으로 사는 사람에겐 모든 기도가 이루어진다.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고 끝내고 나서 감사 기도를 합시다.’
처음에는 나도 기도해서 종이 생긴다는 엉뚱한 생각을 믿지 못한 채 아이들을 이끄는 사명 관계로 새벽 기도회에 나갔지만, 차츰 우리의 기도가 그의 모금 운동에 힘이 된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새벽 기도회의 인원이 늘수록 모금액수가 많아진다는 표시판을 보고서였다. 나는 근 40여 명의 새벽 기도 회원들과 꾸준히 40일 간의 새벽 기도회를 끝마쳤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난 한낮에 거대한 종이 강을 건너 우리 교회 앞에 드리워졌다. 외국 영화에도 소개된 바 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종소리 속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아름다운 습관을 우리는 계속해서 지켰다.
이 종이 우리에게 들리게 되기까지의 황 목사님의 노고를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우리 가슴 속에 깊이 심어 주신 ‘하나님에게 진실로 기도하면 무엇이고 이루어주신다’는 그 신념 하나는 우리 가슴 속에 지금도 굳건히 자라고 있다.”
이 행복을 아이들에게 주자
황광은과 김유선 부부는 난지도 소년시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제주도의 한국보육원이나 난지도의 삼동 소년시나 전쟁 고아를 돌보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사회사업이지만, 황광은은 자기 뜻에 전적으로 동의해 청빈 생활을 달게 받아들이는 내조자, 이를테면 프랜시스의 뜻에 동감했던 클라라와 같은 아내를 얻었기에 좀더 큰 사업, 그래서 좀더 가난과 고통을 요구하는 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 무렵의 황광은과 김유선 부부의 섬김을 제주도 한국보육원에서 일한바 있는, 김유선 여사의 절친한 친구인 이원화 목사의 글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는 다시 제주도의 한국보육원으로 돌아가지만, 이원화 목사의 ‘세월이 가도 여전히 생각나는 분, 황광은 목사님’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는 황 목사의 사람됨을 좀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되었지만 나는 6‧25동란으로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까지 가서 피난생활을 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보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보자고 나는 이화여대 동창인 두 친구와 전쟁고아들이 살고 있는 한국보육원을 찾아갔다.
그곳은 전쟁고아가 900명, 직원들이 100여 명, 합쳐서 1천여 명이 살고 있는 대가족의 공동체였다. 그 대가족이 함께 먹고 자고 산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부모를 졸지에 잃은 아이들이 슬픔과 외로움에 지쳐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들의 표정이 밝고 기쁘게 사는 모습이었다. 나는 마치 꿈나라에나 온 것처럼 신기하게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곧 나를 염려하고 계시는 은사 교수님에게 한국보육원 생활이 얼마나 보람되고 만족스러운가 하는 내용의 편지를 드렸었던 일이 생각난다.
아이들과 점점 친해지고 동료 직원들과도 가까워짐에 따라서 보육원 안의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화제의 대부분은 ‘황 형님’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황광은 목사님을 ‘황 형님’이라 불렀다)
“황 형님은 정말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해요.”
“아이들을 위해 자기를 완전히 희생하는 분이에요.”
“황 형님은 너무나도 아이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마 결혼도 못하실 거에요.”
“황 형님이 이곳에서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나도 계속 이곳에 있어요.”
직원들의 말이 이런 것이었는가 하면, 또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황 형님은 하도 재주가 많으셔서 못하는 것이 없어요.”
“황 형님은 우리들을 생각하고 측은한 생각에 자면서 우신다고 해요.”
“황 형님은 우리들이 양말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있다고 자기도 양말을 안 신고 지내신대요.”
나는 이 큰 가족의 정신적인 기둥이 바로 황 형님이고, 이 분 때문에 아이들과 직원들이 기쁘게 살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바로 그렇게 사랑으로 살고 있는 황 형님의 생활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때 ‘황 형님’은 교육부장직을 맡고 있었다. 아이들은 오전에는 정규 학교교육을 받았고, 오후에는 아동시(Children’s City)가 조직되어 아이들에 의해 시장이 선출되었고 자치적인 생활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각 부서에서 일을 하고 주급을 받았으며, 자기가 번 돈으로 매점에서 자유로이 물건을 사기도 했다.
나는 꼬마 헌병들이 제복을 입고 순찰하다가 선생님을 만나면 경례를 부치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는 또한 밴드부가 조직되었고, 미군 장교 길버트 소령이 와서 지도해 주었다. 밴드부는 행사 때면 연주 행진을 했고, 또 수준 높은 연주회를 열어 모두를 기쁘게 했다. 아동시는 어린이들에게 민주 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생활로 가르쳐 주는 좋은 곳이었다.
황 형님은 이런 조직을 통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며 각 개인이 가진 재능과 능력을 깨우치고 키워 주는 분이었다. 아이들을 만나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 아이에게 꼭 필요한 말을 줄 만큼 한 아이 한 아이 모두에게 관심을 쏟고 사랑을 주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