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4)
기독공보 총무국장 겸임, 큰 책임감 느껴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우리는 내 사촌형 집에서 1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정주읍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촌 형은 정주에서 보건소장으로 근무하다 은퇴를 했기에 지역에서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 60세가 넘은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사촌 형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으나, 동행한 북한 안내원이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 대화를 시작할 수 없었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눈앞에서 놓친 것 같아 얼마나 섭섭하고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은 2006년 7월 14일 서울 서노회 장로회에서 금강산교회를 방문했던 때였다. 금강산교회는 현대기업 직원들이 모여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컨테이너에 십자가를 단 공간이었다. 교역자가 따로 없어 현대 직원이던 최인식 장로가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교회 주보에 따르면 성도 수는 159명이었고, 이들은 맡은 업무(관광공사, 차량, 백화점 등)에 따라 총 10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또 한 주 전에는 64명이 예배에 참석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한국의 교회 건물에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지만, 북쪽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기엔 충분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교회에 성경책과 찬송가 30권을 기증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어디 사람의 생각과 바람대로만 이루어지는가. 북한과 군대를 향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다른 곳에 있음을 귀국 후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자립을 이룬 한국기독공보
1971년 2월 총회 간사로 복직하게 되면서, 한국기독공보사의 일도 맡게 되었다. 총회 간사로 재임명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기독공보 총무국장을 겸임하게 되니 나는 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 년 뒤, 기독공보 책임자였던 총회 총무 김형태 목사를 통해 나를 기독공보 초대 전무이사로 보내셨다. 한 기관의 운영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당시 총무국, 편집국, 광고국 직원 8명이 4쪽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총회 간사로 재임명되던 당시 김형태 목사가 나에게 기독공보 총무국장직을 맡긴 것은, 기독공보의 제반 현황 파악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공보는 1968년 공무국(인쇄와 제작 부서) 미비라는 이유로 폐간되었다가 1970년에 김형남 장로, 최창근 장로, 이봉수 장로, 정세비 장로 네 분의 헌금으로 공무국을 신설하여 복간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발행 7천 부 중 4천 부는 수금이 전혀 되지 않는 실정이었기에 재정이 나아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과거 교육부 총무였던 안광국 목사와 간사 김암 장로가 섬김과 봉사의 마음으로 헌신하여 겨우 유지되어 온 것이었으며, 공무국 신설을 도운 네 분의 장로와 김성섭, 김광수 장로들이 매월 고정적인 특별헌금을 해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디까지나 몇몇의 헌신으로 겨우 숨이 붙어 있었을 뿐 당장 폐간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대로 두면, 하나의 기관으로 결코 온전히 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할 때, 어려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립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고정적인 수입을 올려야 했다.
나는 우선 한두 차례에 걸쳐 구독료 납부를 독촉하고, 그 후로도 구독료를 내지 않는 4천 부는 발송을 중지했다. 일정 기간 발행을 3천부로 줄여 재정을 아낀 후 다시 출발해 보자는 의도였다. 또 봄가을 정기 노회 때마다 각 노회를 방문하여 회장석에 서서 복간된 기독공보가 자립할 수 있도록 제직 가정당 1부 구독과 교회마다 자립기금 5만 원을 후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전도부 재직 시 선교달력 대금 수합을 위해 시, 읍 소재지 교회를 방문했던 일과 대도시에서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일로 노회원 2/3 정도와 구면이었던 것이 내게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자립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여러 교회를 다니기도 했다. 시외버스들이 위험수위를 넘나들며 시속 120킬로미터 이상으로 질주하는 때였고, 또 분리된 노회들이 전통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같은 날짜와 시각에 각기 다른 교회에서 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각 노회 순방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매번 하나님은 나를 지켜 주셔서 무리한 일정 가운데서도 아무런 사고 없이 전국에 있는 많은 노회들을 다닐 수 있게 도우셨다. 또한 1972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기독공보 자립기금 모금을 위한 선명회 합창단 공연을 두 번이나 가지기도 했다. 기독공보 광고를 통해 약 3천 명이라는 많은 인원을 모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기독공보 이야기를 하자면 박순옥 장로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각 노회 여전도회 연합행사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잔심부름과 궂은 일을 하면서 여전도회로 하여금 기독공보를 군전도 문서선교에 이용하도록 설득한 사람이다. 남자 혼자서 여자들만 모인 곳에 가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워낙 사교성이 뛰어나고 격식 없이 사람들과 잘 사귀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 장로의 노력과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여전도회 덕분에 ‘기독공보 군부대 보내기 운동’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안정된 발행 부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판매 부수는 몇천 부 늘어났고 후에는 2만 부까지 찍을 수 있게 되어 재정자립을 이룰 수 있었다.
1978년 3월,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헌신으로 모금된 자립기금과 미국장로회 CUSA 중요선교기금으로 받은 보조금 3만 달러와 1976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요람 1천 권 발행 수임료로 등촌동 기독공보 사옥 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기독공보 초대 전무이사가 된지 7년 만에 자립의 꿈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재정적인 도움과 몸으로 뛰며 자기 일처럼 애쓴 이들의 땀, 전국 교회 여전도회들, 그리고 1973년부터 자립기금 1구좌 5만 원 모금 캠페인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대로 인쇄비를 주지 못하는데도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인쇄공장 시설을 이용하도록 해준 공무국 유근창 장로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러한 많은 헌신과 정성이 모여 기독공보가 독보적인 교계 언론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자립기금을 위해 만난 많은 분들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여전히 고마운 두세 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묵정동에 위치한 서울노회 신광교회 오만순 장로와 무학교회 박의배 장로, 그리고 제주 보목교회 송정호 장로이다. 일면식도 없는 내가 기독공보 자립기금을 청원했을 때, 그 자리에서 흔쾌히 한 구좌씩 후원해 주신 분들이다.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그때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서울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 양돈 사업을 크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립자금을 부탁하기 위해 수차례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독공보 사무실로 그 집사님이 직접 찾아오셨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