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희 선교사] 섬김으로 일으킨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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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네팔에서 두 번째 사역을 하고 있을 때, 경북 안동에 있는 안동성소병원의 원장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의사들이 많은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이나 요청을 받으면서 다시 생각하고 기도했다. 기도를 해보니 더 이상 내 의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해 11월에 안동성소병원 14대 병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 병원은 1909년에 미국인 선교사 플레처 박사(Dr. A. G. Fletcher)가 세운 병원으로 한동안 경영상의 문제가 있어서 큰 교회에서 인수해 대대적인 정리로 정상화가 되었으나 여전히 수습할 부분이 많은 상황이었다. 

부임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응급실 앞을 지나가는데 병원의 간호사와 그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친구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누가 아픈데 어느 병원으로 가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러자 간호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병원에는 오지마.”

나는 순간 너무나 놀랐다. ‘아! 이것이 문제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선 노조위원장부터 만났다. “이 병원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병원에 비해 직원들 월급이 너무 적습니다.” “병원이 잘되면 자연히 월급도 오를 것 아닌가요?” 노조위원장은 월급을 먼저 제대로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말했다. “그러면 병원이 망할 것 아닙니까?” 위원장의 말을 듣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지혜를 주셨다. “만약에 어떤 재벌이 와서 병원을 호텔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병원 직원들을 다 그만두게 한다면 노조위원장이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노조위원장이 흠칫 놀랐다. 나는 함께 잘해 보자고 그를 설득했다. 그 후 원장인 나와 노조위원장 사이에 이야기가 잘 풀려나갔고, 노조가 모이기 전에 안건을 미리 조율할 수도 있었다.

나는 병원의 직원들은 모두 귀한 일꾼이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임을 명심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섬기기로 했다. 우선 병원 운영진에게 직원들이 걸어서 출근할 수 있도록 병원 가까운 곳에 사택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병원 구석구석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서 있으면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직원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독교 병원이라 지역의 교회와 조직들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교회를 향한 문을 활짝 열었다. 병원의 각종 모임마다 원목실의 목사님과 함께 참석해 직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노력했다. 십일조와 생활비를 제외한 내 월급의 대부분이 병원에 관계되는 일에 들어갔다. 직원의 가족이 더 큰 병원으로 가서 암 수술을 받는다든지 하면 위로의 말을 하면서 금일봉을 건넸다. 직원들의 경조사에도 꼭 참석하려고 애를 썼다.

어느 날 간호사가 처방을 잘못 보고 실수해 환자에게 피해를 입히고 병원에도 손해를 끼쳤다. 그 무렵 신입 간호사 두 명도 실수를 해 모두 징계 처분을 받게 되었다. 나는 간호부장을 불러 징계 처분을 받은 간호사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위로해주었다. 

그 소문은 금방 병원 내에 번졌다. 병원이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지 1년 만에 직원들 사이에서 “내 병원, 우리 병원”이라는 말이 나왔다. 환자도 늘어서 부임 4개월 만에 입원실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원장실까지 입원실로 내주게 되었고, 290개 병상에서 급히 340개 병상으로 늘려야 했다.

그런데 그 무렵 의료 수가(酬價) 문제로 의료계가 대혼란을 겪으며, 전국의 의사들이 서울로 집결해 사상 초유의 시위를 했다. 많은 의사들이 개업하기 위해 퇴직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성소병원은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큰 어려움들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병원이 자리를 잡은 이듬해인 2000년 3월에 나는 선포하듯 말했다. “금년에는 외국으로 이동진료를 갈 예정입니다.”

직원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1909년 개원한 이래 9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외국에 이동진료를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지망자가 적어 인원을 모으기가 힘들었다. 8월쯤 되니 점차 윤곽이 드러나며 이동진료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팀원 각자가 동료 직원 중에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줄 다섯 명의 기도그룹을 만들어 중보하게 했다. 

드디어 열세 명의 직원이 캄보디아로 첫 의료 선교를 떠나게 되었다. 내가 팀장이 되어 현장에서 매일 저녁 평가회를 가졌다. 첫날 평가회에서 소아과 과장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팀원 모두가 자신이 그저 월급을 받고 맡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울 수 있는 귀한 존재임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우리가 투자한 것의 몇십 배 이상의 예상치 않은 소득이요 축복이었다.

놀라운 일은 한국에 돌아와서 시작되었다. 병원에 돌아오니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모두 내게 와서 물었다. “다음에는 언제 해외 이동진료를 갑니까? 그때는 저 좀 꼭 데려가 주세요.”

또한 병원은 완전한 흑자는 아니더라도 날로 번성해갔고, 웃음과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나는 그때까지 선교사로서 20여 년을 사역하면서 무엇을 익히고 배웠나를 묵상했다. 그러는 가운데 병원의 원훈을 ‘성실, 화합, 섬김’으로 정했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연약한 종을 들어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심을 보게 하셨다.

병원은 날로 번창했고, 나는 지원 교회에 요청해 300평 부지에 8층 건물을 증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2002년 6월, 새로운 병동의 공사가 시작될 무렵에 나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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