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향기] 한국기독교수필문학회 회장 오성건 장로(송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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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소명이었고 일터는 사명지였다

한국방송의 사령탑 방송위원회 33년 근속, 퇴임 후 文人으로 제2의 인생

1997년 12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오성건 장로(85세, 송정교회 원로)는 33년을 몸담은 평생직장인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 심의실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오성건 장로는 퇴임사를 통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이 자리까지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방송위원회 선후배 및 가족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고 전했다. 그 후 27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 9월 26일 본보 르비딤홀에서 만난 오성건 장로는 “다시 시간을 돌려도 방송위원회 심의실장으로 일하고 싶고, 지금도 방송위원회 심의실장의 눈으로 방송을 보며, 다시 태어난다 해도 방송위원회 심의실장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그 이유로 “39세에 장로가 되어 일터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지로 여기고 매일 기쁘고 보람있게 청지기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오성건 장로는 “문득 그리워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오직 하나님 은혜만 가득하다”며, 인생의 각 챕터를 풀어냈다.

새우잠 자며 고래 꿈을 꾸고

오 장로는 1939년 7월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 장로의 아버지는 별성(星)자에 열쇠 건(鍵)자를 써서 “하늘의 별을 열고 닫는 열쇠를 소유한 자가 되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줬다. 1945년 해방 직후 한국기독교에 성령의 바람이 불던 시기, 온 가족이 뜨겁게 신앙 생활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오 장로는 신태인역에서 남성고등학교가 위치한 이리역(현 익산역)까지 매일 2시간을 왕복하며 통학했다. 6.25 전쟁의 흔적으로 통학 열차 사정이 극히 열악해 창도 없는 화물열차를 타기 일 수였고, 열차 안은 수많은 인파가 뒤섞여 온갖 악취가 진동했다. 더러운 바닥에 비좁게 앉아서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을 외웠지만, 오 장로는 당시를 “새우잠을 자며 고래 꿈을 꾸던 시절”이라며, “푸른 꿈을 한 아름 안고 있던 시절, 통학 길은 수고보다는 즐거움이었다”고 회상했다.

2008년 4월, 오 장로는 남성고등학교 제8회 졸업생으로 졸업 50년을 기념하는 모교 방문 행사에 참석했다. 3학년 네 개 반(한 반에 60여 명) 졸업생 중 이미 60여 명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오 장로는 오늘도 숨 쉬며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오랜 시간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 고교 친구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고 자라고, 가난과 함께 살던 거친 세상 긴 여정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또 스치고 부딪치며, 웃고 울며, 뿌리고 거두면서, 울분하고 고뇌했던 모든 인연들이 이제는 오래된 기억 저편의 아름다움에 향수가 되었다.” (자서전 ‘처음이고 마지막 쓰는 자화상’ 중)

방송계 입문 33년 꿈같은 시간

오 장로는 법조인의 꿈을 안고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해 1958년 졸업 후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신문의 방송윤리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 전신) 심의위원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충남지역방송·KBS대전방송·대전MBC·군산/서해방송을 심의할 방송심의책임자 시험에 합격한 후 대전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오 장로는 부임 후 가장 먼저 교회부터 찾아 대전제일교회에 등록해 성가대원으로 봉사했으며 그 후 외할머니의 중매로 전북 부안에 박환규 장로의 막내딸 박복순 양과 결혼해 2남 1녀를 얻었다.

오 장로는 첫 근무지인 대전을 “좁은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한 곳, 귀한 3남매를 선물로 받은 곳, 충남제일교회(현 주향교회)에서 장로로 세움 받은 곳,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곳, 20년 사는 동안 희노애락이 잠겨 있는 곳”으로 기억했다.

오 장로는 1980년대 초반 전두환 대통령의 언론 통폐합을 계기로 대전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고, 서울노회 송정교회(고 문홍지 목사, 현 권혁성 목사 시무)에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우리나라에 텔레비전이 가가호호 보급되면서 오 장로는 “국민이 잠들었을 때 조용히 깨워주고, 분노하고 흥분했을 때 달래주고, 웃다가 편히 잠들게 하는 오래오래 생각나는 유익한 방송이 되도록 밤을 새워가며 고뇌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한국방송심의 책임자로서 방송사와 광고업계로부터 무거운 압력과 청탁 및 회유가 쉼 없이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러면서 방송위원회에 기독신우회를 처음으로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오 장로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방송위원회 심의실장을 역임하는 동안, 초기 지역민영방송 허가를 위해 전국의 지역방송사 간부 및 전사원을 대상으로 방송심의 규정 특강을 펼치는 등 한국방송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9월 3일 한국방송 70주년 기념식장에서 제193호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상했다.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기고

58세에 정년 퇴임 후 오 장로는 3년 동안 방송위원회 방송영화심의 전문위원, 방송광고심의 전문위원, 보도교양 심의위원, 연예오락심의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각 영역의 심의위원으로서 분야별 심의규정을 전문적으로 살피는 한편, “방송사와 가까이도 말고 멀리도 말고”라는 슬로건 아래 청렴결백하게 자리를 지켰다.

2000년 3월 어느 날 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이전에도 두통이 있었지만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 진통제로 버텨오던 차, 어지러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진찰 결과 “7cm 뇌종양이 있다”고, “많이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았느냐”며 빠른 수술을 권유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각서를 쓰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머리를 여는 큰 수술을 했다. 하지만 깨어나 보니 얼굴 한쪽에 느낌이 없었다. 의료진을 찾아 크게 항의하니 “신경을 건드려 가며 수술했기에 지금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며, 시간이 지나면 정상회복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 오 장로는 잔기침이 멈추지 않아 서울아산병원에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았고, 이후 폐 조직검사를 하고 폐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오 장로는 “7년 동안 머리를 열고, 가슴을 열어 죽을 고비를 2번이나 넘겼다. 지금도 얼굴과 몸에 남아있는 수술 흔적을 보며 죽음에서 두 번이나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생각한다”며, “무엇보다 가족 및 지인들에게 ‘사랑의 빚진자’가 됐다”고 고백했다. 오 장로는 두 번의 대수술을 겪는 동안 “어머니와 사랑하는 내 아내는 새벽마다 기도하며 노심초사의 시간을 보냈으며, 자녀들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아빠가 행여 기다려 주지 않으면 어쩌나’하며 마음 졸였다. 정 넘치게 쏟아 부어준 형제들과 중보기도로 함께 마음 아파한 송정교회 권혁성 담임목사님 이용오 부목사님을 비롯한 성도들…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너무나 큰 사랑의 빚을 졌다”며, 감사를 전했다.

여든 고개에 피워낸

60대에 찾아온 질병도 사랑과 감사로 승화시킨 오 장로는 30여 년 취미생활로 여긴 글쓰기와 시 창작에 속도를 내어 2008년 자서전 ‘처음이고 마지막 쓰는 자화상’(청양문화사)을 출판했다. 이어서 2016년 75세에 월간 ‘수필문학’에 수필가로 등단, 같은 해 월간 ‘문학세계’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후 2020년 시집 ‘한세상 사노라면’(교음사)에 이어, 올해 3월에 시집 ‘사무친 사랑이여’(교음사)를 출간했다. 이명재 문학평론가(중앙대명예교수)는 서평을 통해 “남들은 문단에서 붓을 던질 무렵 첫 시집을 선보였다”며, “어르신 문학의 마중물”로 소개했다.

오 장로는 비록 늦게 시작했지만 훌륭한 스승에게 사사(師事)한 준비된 문인이었다. 30여 년 전 김춘수(1922-2004) 시인이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이던 때, 오 장로는 기획국장으로서 3년 동안 함께 시문학에 대한 토론을 주고 받았다. 당시, 당대의 문인들이 책을 들고 김춘수 위원장을 방문하는 일이 잦았는데, 김춘수 위원장은 오 장로에게 책을 건네며 이튿날 감상평을 묻곤 했다. 그렇게 30여 년을 취미와 특기로 삼던 글쓰기를 여든 고개에 수필과 시로 정성껏 피워냈다.

하나님의 선물, 믿음의 명가(名家)

글쓰기 외에도 오 장로는 하나님께 찬양의 달란트를 받았다. 주일학교 학생 때 시작한 교회 성가대 활동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주 연세대장로합창단 소속 테너로 연습하며 활동하며, “호흡이 허락할 때까지 찬양을 부르고 또 부르고 싶다”고 고백한다.

오 장로는 기쁨으로 찬양하고, 감사로 일하는 동안 첫 근무지인 대전에서 1978년 39세에 장로로 장립 받고, 이후 1987년 10월 송정교회에서 시무장로로 취임했으며, 2009년 11월에는 송정교회 창립 이래 세 번째 원로장로로 추대됐다. 아내 박복순 권사 또한 권사회 회장, 여전도회연합회 회장, 에벤에셀 찬양대원으로 기쁨으로 사명 감당했으며, 2남 1녀 또한 모두 출가 후 믿음의 대를 이어가고 있다.

오 장로는 가족들의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이야기했다. 첫째 현승(강주희 권사)은 지난해 7월 송정교회에서 장로 장립 하며 한 교회에서 장로 부자(父子)가 됐으며, 둘째 현주는 미국 샌디에고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집사로 구역장과 수요찬양팀 리더로 섬기며, 미국 기업 퀄컴 감독인 사위 구자곤 권사는 수요찬양팀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차남 현중(신은정 집사)은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 시무)에서 안수집사회 회계를 맡고 있다.

오 장로는 “며느리와 사위, 손자(나이순_ 본영, 본우, 한빈, 한웅, 한영)까지 온 가정이 모두 믿음과 은혜 안에서 열심히 사명 감당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다”며, “말할 수 없이 행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전했다.

오 장로는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365일 24시간 시상(詩想)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문득 떠오르는 추억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에서도 시상을 떠올린다. 지금처럼 시와 수필을 쓰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고백하며, 자작시 한편을 소개했다.

‘어느 여름 날/나 찾다가//새벽마다 기도하던/성전 맨 앞 빈자리에//내 손때 묻은 성경만/펴 있거든//가브리엘 천사/손 잡고/좋아라 더덩실 춤추며//하늘나라/백합꽃/구경간 줄 아시게’(시 ‘여보시게!’)

/박성희 기자

오성건 장로는 30여 년 전 시인 김춘수에게 시를 사사한 후 70대에 시집 두권을 출간했다.

표천(瓢泉) 오성건 장로 약력

*표천_조롱박으로 퍼서 먹는 옹달샘
– 중앙대법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 졸업, 고려대언론최고위과정 수료
– 방송위원회 감사실장, 기획실장, 방송심의실장 역임
– 김춘수 시(詩) 사사, 강석호 수필(隨筆) 사사
– ‘수필문학’ 수필 등단(2014), ‘문학세계’ 시 등단(2016)
– 한국문인협회, 국제팬한국본부,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한국기독교시인협회 소속
– 한국장로문인협회 회장 역임(2021)
-한국기독교수필문학회 회장(현)
– 미당시맥회 부회장(현)
– 기독교수필문학회 회장(현)
– 중앙대문인회 부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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