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온전히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확신”
질서와 순리로 살아온 박화섭 원로장로의 삶

▐ 신앙의 시작
1947년 9월 3일 해방 후, 당시 서울 영등포구 흑석동 중앙대학교 앞에 형성된 서민 중의 서민들이 사는 허름한 집에서 박화섭 장로는 하나님을 모르고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6·25 전쟁으로 피난길에 올라 농촌에서 도토리, 소나무 껍질이나 찔레 줄기 같은 것들로 끼니를 해결하며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어려웠던 유년기와 피난 생활 이후 서울로 올라와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일요일 경무대를 나와 용산우체국 뒤편 육군 수송부대 앞산에 위치한 육군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동승하고 저희 집 앞 큰길(한강로)을 지나가는 차량을 보았어요. 대통령이 예배당에 가시면서 손을 흔드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려 동네 형들과 그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시작됐어요.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교회에서 주는 연필과 어린이 잡지 ‘새벗’을 받는 그 기쁨에 교회에 출석했어요.”
박화섭 장로는 피난 생활 당시 정착해 살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마루 밑에 보관돼 있던 양잿물을 얼음인 줄 알고 먹었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지내던 시절, 한강로 대로에서 군용 three quarter 트럭에 치여 어린 나이에 뇌를 다쳐 남대문 세브란스병원에 장기 입원을 한 적도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개구쟁이 짓을 하다 보니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일이 있는가 하면 폐결핵을 앓아 군대도 제 나이에 가지 못하는 병든 연약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매 순간 연약한 저를 지켜 주시어 학교에도 정상적으로 출석할 수 있었고 무사히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며 어린 시절 주님께서 지켜 주셨던 매 순간을 고백했다.
▐ 신앙생활의 전환점
박화섭 장로는 중학교 시절 4·19 학생의거로 희생되거나 부상당한 형들을 위로하기 위해 ‘청송회’라는 자선단체에 들어가 고등학교 형들을 따라다니며 모금 활동을 했다. 국군수도병원, 적십자병원 등을 방문해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로하는 선배들의 활동에 동참하며 사회에 봉사하는 생활 습관이 길러졌다고 한다. 이는 예수님을 알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저는 늘 나만의 생각과 내 위주의 주장만을 일관되게 고집하며 지내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번도 먼저 제가 무엇을 해봐야 되겠다고 아귀다툼하듯 경쟁하며 투쟁하듯이 질서와 순리를 어겨 가며 일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박 장로는 “대학 생활을 하며 미약하지만 사회봉사를 알게 되어 ‘MRA’라고 하는 도덕재무장운동(프랑크 북맨 창설) 기구에 참여하게 됐다. 창시자가 주창해 온 기독교 정신인 절대 정직, 절대 무사, 절대 사랑, 절대 순결의 생활을 강조하는 캠페인에 동참하며 사회 정화 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67년 여름 약 1개월 동안 헬리콥터로 이동하며 베트남전쟁 중 월남에 파병된 주월 한국군을 위문하는 큰 경험을 했다”며 “이런 경험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활동은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점철되어 현재의 헌신과 봉사하는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었어요. 사회관계와 대인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듯한 생활로 인해 원만한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겪었던 이러한 생활 습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심, 배려가 전해져 신앙이 한층 더 성숙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 주님과 함께 해온 인생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건강도 점차 좋아져서 늦게나마 군대 생활도 잘 마칠 수 있었어요. 아울러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연유로 국가 연구 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도 주어졌죠.”
박화섭 장로는 대학에서 금속에 대한 공부를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군대를 거쳐 국가 연구 기관에서 길지 않은 생활 후 1977년에 현재의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한 업종에만 전념해 종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적극적인 교회 활동을 해온 박화섭 장로는 공장이 폭발하는 엄청난 사고가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 속에 평범한 삶이 지속되었다고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근면과 검소한 생활로 사업체도 무난히 운영하며 교회 생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은혜를 받았어요.”
박 장로가 현재 영위하는 사업체 히마라야금속은 50년째 동일한 아이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역경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 우물을 판다는 일념으로 일해 왔다. 창업 때부터 함께한 직원도 있고, 수십 년 동안 동행한 자랑스러운 직원들도 있다.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일터와 연합 기관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부족하지만 헌신과 봉사를 이어 가던 중 36세에 안수집사의 중직을 받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충만해져 교회를 내 집같이, 내 몸같이 섬겼더니 주님께서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장로 장립을 받는 은혜를 주셨다”고 고백했다.
노력과 헌신, 봉사로 인생을 살아온 박화섭 장로는 서울역 노숙인 지원, (사)해돋는마을 법인 이사, 네팔 지진 피해 복구에 재정적 지원으로 돕기도 했으며, 서울지방국세청 모범 납세자 표창(2014), 본 교단 총회 제102회기 총회장 공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 신앙의 발자취
박화섭 장로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삼각교회 교육관 건축을 위한 건축위원장으로서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 교육에 힘썼다. 이외에도 삼각교회 70년사 발간위원장으로 섬기고, 서노회 남선교회 30년사, 용산연합재직회 50년사 편찬위원장으로도 봉사했다. 이외에도 교계 연합 사업에서 수많은 봉사를 해왔다.
“고명하신 선배 장로님을 따라 연합 기관에서 봉사하게 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 연합 사업에 몰두하게 됐어요. 이해관계 없이 맡겨진 일에 전념했고, 선교 사역을 접하면서 미개발 아열대 지역에 의료선교 봉사 지원을 다니기도 했죠. 또한 지진 피해 지역에 물품을 동반한 지원 사업에 동참하는 경험도 했어요.”

그는 남선교회 활동을 하던 중 2008년 7월 평양봉수교회 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선교의 열정이 더욱 충만해졌고, 적극적으로 연합 기관에 동참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구령 사역에 참여했다.
박화섭 장로는 “형통하지 않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연합 활동을 하며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말씀을 삶의 고백으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 역시 온전히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확신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박 장로는 서울서노회 장로회 및 남선교회 연합회 회장, 노회 임원을 거쳐 부노회장, 남선교회 전국연합회 부회장,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총회 특별재심위원, 총회 재정정책 위원장, 제99회기 장로 부총회장을 역임하고 평신도신문사 실행 이사, 한국장로신문사 부이사장으로 섬겼으며 현재는 한국장로대학원 교무부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 제99회기 장로 부총회장
1962년부터 삼각교회로 신앙의 터전을 옮긴 박화섭 장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99회기 장로 부총회장으로 봉사했다.
그는 부총회장 장로 후보 당시 “목사와 장로가 힘을 모으고, 마음을 같이해 주님의 선을 도모하면 반드시 능력이 넘쳐나리라 믿는다”며 “별세한 위대한 만델라 대통령은 ‘변화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할 때 가능하지만 그 시작은 한 사람의 힘으로부터 된다’고 말했다. 저 혼자는 다 할 수 없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작은 것부터 시작할 때 본 교단과 한국교회의 변화가 시작되리라 믿는다”고 소견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다툼하듯 경쟁하며, 투쟁하듯이 질서와 순리를 어겨 가며 생활하지 않는다’는 그의 인생관과도 상통한다.
박화섭 장로는 “장로 부총회장 재임 당시, 도농 간 교회 동반 성장 위원회 위원장으로 섬기며 특히 농어촌 교회의 어려움을 도회지 교회와 연계해 목회를 공유하도록 했던 일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손꼽았다.

박화섭 장로는 장로 부총회장 당시 교단의 어려운 문제였던 양화진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장으로서, 복음주의 역사신학회의 협력을 통해 양화진의 진실에 관한 교회사적 연구를 심화·촉진하고 이를 교계와 학계에 널리 알려, 선교사들의 숭고한 선교 열정을 온전히 보전하는 일에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 건전한 신앙생활을 침해하고 하나님을 왜곡·사유화하는 이단·사이비에 대응하기 위해 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며 교단이 건실하게 서도록 힘썼다.
또한 “장로 부총회장으로 활동 중 특히 선교 150주년 기념과 제60회 대만 장로교회 총회에 방문해 인사말을 전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며 “본 교단과 대만 장로교회는 지난 1973년 상호 협정을 맺은 이래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서로 협력해 왔다. 세계 교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양 교단의 협력은 서로 격려하고 함께 발전하는 좋은 디딤돌이 될 것”이라 인사말을 전했다고 했다.
▐ 신앙관에 대해
박화섭 장로는 “저의 신앙관은 경기도 안산의 안산제일교회를 방문했을 때, 담임이신 고훈 목사님께서 쓰신 ‘아사교회사(我死敎會生), 아생교회사(我生敎會死)’라는 휘호를 보고 형성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내가 살면 교회가 죽는다는 뜻입니다. 나의 고집과 주장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서로 배려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높여 줄 때, 나 또한 높여진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족한 사람이 이러한 조화로운 사고와 신앙으로, 아론과 훌과 같은 입장으로 담임 목사님을 섬기고 맡겨진 역할을 감당하며 협력하고 책임을 다해 왔다고 생각해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며 진취적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역자를 존경하며 성도들을 존귀히 여기며 교회 생활을 해왔죠. 앞으로도 섬김과 배려와 예의를 지키며 겸허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박 장로는 “교회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다. 교회가 형통하고 하나님의 일을 통해 부흥하며 성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양보하고 조금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며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 앞으로의 신앙
“앞으로는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베드로 사도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확실한 신앙 고백을 하는 백성들이 되도록 돕는 선교 기관에서 봉사하기를 소망하고 있어요. 특히 소외된 이웃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미약하나마 섬기고 있죠. 서울역 부근 노숙인들의 식사 문제에도 관심을 두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박화섭 장로는 “지금의 저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중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는 말씀 구절을 참 즐겁게 마음에 새기고 생각하며 그저 은혜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의 CEO로서 현장에서 일하며, 현장이 곧 선교의 자리라고 믿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아침 기도로 시작해 가족들과 카카오톡으로 말씀 큐티를 나누고 있답니다. 하루 종일 주님과 동행하기를 구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접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살고자 해요.”
/석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