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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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렴 선교사 헌신으로 설립, 훌륭한 지도자 배출

지난 3월 5일에 체포됐던 학생과 시민들은 모두 실형을 받게 됐으며, 당시 영명학교 전문부에 다니던 강문호는 대구 복심원까지 이송되어 거기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제 나라를 찾겠다는데 남의 나라를 빼앗은 강도들이 사람을 처벌한다는 것이 웬말이냐.”

강한 항의를 받은 일본인 재판관은 혹독하게 1년 6개월이라는 형을 언도했으며 역시 박연세도 대구까지 가서 재판을 받고 2년간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한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던 김병수는 다시 자신의 고향인 익산을 중심으로 3‧1 운동을 전개해 갔다.

이렇게 전위렴 선교사의 피와 땀으로 설립됐던 군산 영명학교는 많은 민족 지도자와 교계 지도자들을 배출했으며, 그 중 이수현 목사는 민주 군관학교에 진학해 평양 3‧1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후 그는 그의 동료 이창규 목사와 함께 평양신학교에 진학해 목사로서 호남 지방에서 목회를 하다가 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인전도 얼마 동안 교사로 재직하다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해 목사가 된 후 전주 서문교회의 청빙을 받고 그곳에서 목회를 했다.

민족주의자 박연세

바로 1919년 3‧1 운동의 전주 책임자로 활동하던 김인전 목사는 일본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얼마 동안 전주 예수병원 입원실에 숨어 있다가 3‧1 운동이 잠잠해진 4월경에 군산을 빠져나와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거기서 전북 대표 의정원(국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21년에는 의정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1922년 조국 하늘을 바라보면서 끝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 하늘 아래에 있는 중국 상해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한편 전위렴 선교사에게서 전도를 받았던 김제 청년 박연세는 그 길로 군산 영명학교 중등과에 진학해 신문화를 접했으며, 중등과를 졸업하자 김제 백구에 있는 신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로 왔다. 군산 영명학교에서 한국역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의식화 교육에 열중하던 그는 결국 군산 지방 3‧1 운동 주모자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그 추운 감방에서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으며, 기도하던 중 교사로서는 민족운동의 한계를 느껴 출감과 동시에 곧바로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구암교회의 시무장로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교회 운영이나 정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3년간의 교육을 이수하고 부위렴 선교사 구역인 황등 동년리교회, 고현교회를 오가면서 두 교회를 섬겼는데 그의 목회사역이 전남 목포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그는 목포에서 청빙을 받았으나 많은 교인들이 그 이동을 반대했다. 그러나 목회자의 이동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목회 철학으로 짧은 목회였지만 1926년에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던 교인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목포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포역에 도착하자 그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교인들의 영접을 받고 목포 양동에 자리잡고 있는 목포교회로 부임했다.

그런데 그가 부임한 지 10년이 지난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박연세 목사는 노골적으로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는 설교를 했다. 그후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이 일에 적극 협력하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1942년 7월 7일 중일전쟁 5주년을 기념해서 전국 교회 목회자로 하여금 천황군을 격려하고 중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설교를 부탁했으나 이때도 박연세 목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면서 오히려 천황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1943년 7월 어느 날 일본 고등계 형사는 영장도 없이 목포교회 사택을 수색하고, 박연세 목사를 체포했다.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박연세 목사는 죄수복 차림으로 재판정에 들어섰다.

“박 피고는 예수가 재림하면 천황도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네, 사실입니다.”

화가 난 재판관은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가 책상을 내리치면서 박연세 목사에게 소리를 쳤고, 일본 재판관은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에 놀란 박연세 목사는 즉각 항소를 했고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갔다.

박연세 목사는 1919년 3‧1 운동을 주동했다고 해 그대로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대구형무소와 박연세 목사와는 그렇듯 악연이었다. 수감중 박연세 목사는 목포교회 교인들의 그 따뜻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경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몇 사람의 교인들 때문에 박연세 목사의 마음은 더욱 찢어질 듯 아팠다. 여전히 대구복심원에서도 그의 결연한 의지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피고는 이 세상에서 누구를 제일 존중하나?”

“육적으로는 천황을 존중하고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합니다.”

화가 난 재판관은 책상을 내리치면서 박연세 목사를 위협했다.

“박 피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면 천황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는가?”

“네, 변함이 없습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원심 그대로 징역 2년이 선고됐다. 이때 박연세 목사는 자신이 죽어야 민족도 살고 교회도 살 수 있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에게 예수를 소개했던 전위렴 선교사는 그야말로 성경 말씀대로 살았던 위대한 선교사라고 존경해 왔었다. 그래서 전위렴 선교사는 성경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살다 간 순교자였기에 박연세 목사 자신도 전위렴 선교사처럼 순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1945년 2월 15일 세찬 북풍은 대구형무소 사상범이 입감되어 있는 독방에도 모질게 불어오고 있었다. 이미 박연세 목사는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그는 날마다 독방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무릎 꿇고 두 손 모아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러던 중 일본 간수가 뿌린 물이 감방 바닥에 얼어붙어 박연세 목사는 동사하고 말았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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