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병동… 힘든 만큼 큰 보람 느껴
한국교회, ‘한 알의 밀’ 역사가 계속되다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한 아버지가 자신을 대신해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했던 그 뜻을 어긴 것이 김광식 장로에게는 평생의 짐이요, 부담이었다.
그는 이민자의 삶을 시작하면서 공무원이 되었다. 다른 길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나 늘 마음 한편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부담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목사의 마음으로 섬기는 일들을 시작했다.
우연히 시작한 사역이 마약 중독자 순화 사역이었다. 마약 중독자들을 도와 그들이 마약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왔다. 그들이 중독을 이기고 새 삶을 살게 하는 재활 프로그램이었다. 열심히 돕고 섬겼다. 나름대로 보람도 느꼈다. 그런데 한계를 느꼈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이 너무 컸다. 한인 커뮤니티였으나 섬겨야 할 대상들이 주로 한인 2세 젊은이들이었다.
마약 중독자 순화 사역에서 직면한 한계로 고민하다가 호스피스 사역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제대로 사역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으로 건너가 샘물호스피스에서 연수도 받았다. 2001년 5월 1일 공식적으로 이 사역을 시작했다. ‘엔젤스 크리스천 호스피스’라는 비영리 법인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마지막 지점을 보내고 있는 환우들을 돕고 그들을 섬기는 것은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었다.
환우에게 복음을 전하고 환우의 천국 삶을 준비하게 하는 사역이었다. 호스피스 사역은 많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했다. 육체적 섬김과 노동은 물론 감정 노동이기도 했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연과 간증을 남긴 호스피스 사역은 큰 보람으로 남았다.
힘든 호스피스 사역을 돕던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어하는 시점에 김광식 장로는 원목실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광식 장로의 아내 김사정 권사가 간호사로 오래 근무한 LA 카운티 병원 원목실의 요청을 받은 것이다. 친분이 있는 병원 원목실 관계자의 추천과 권유로 시작한 원목실 사역은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전문 사역을 제공했다. 예컨대 상담과 영적 돌봄 등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했다. 예를 들면, 통역과 무보험자들을 소셜 담당자에게 안내하는 일 등이었다. 이런 섬김과 돌봄을 통해 주님 사랑을 전하며 직간접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감사하고 복된 일이었다. 이런 일을 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김희철 장로님과 할아버지 김석창 목사님을 뵐 면목이 생겼다.
김광식 장로는 40년 이상 섬겼던 LA 영락교회를 떠났으나 나성영락교회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섬기는 기쁜우리교회도 김 장로의 기도 제목이다. 더 바르게, 더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진짜 예수쟁이의 기도요, 소원이었다.
한 알의 밀알은 땅에 묻혀 썩으나 싹이 돋고 잎이 피어 꽃을 볼 수 있게 되면 열매를 맺는다. 한 알이 몇 알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목사 한 사람의 후예들, 후배들이 자라서 더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한 알의 밀’ 역사는 무한한 역사를 이룩한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런 한 알의 밀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서 세계 끝까지 복음의 선두자로 뻗어갈 것을 믿으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계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