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38)

Google+ LinkedIn Katalk +

최흥종 목사와 윌슨 선교사의 나환자 사랑과 헌신

윌슨 선교사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매일같이 봉선리 마을에 있는 나환자촌을 철거하라’는 데모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최흥종 목사는 전남도청을 드나들면서 대책을 간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한편 그는 광주 YMCA를 창설하면서 회장직을 맡았던 경험이 있어서 광주교회 교인들과 광주 YMCA회원들과 합세해 광주 시민의 데모를 막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일을 일시적으로 해결한다 해서 나환자가 계속 봉선리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는 보장은 되지 못했다.

나환자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

최흥종 목사는 나환자들을 이끌고 조선총독부가 있는 서울로 상경해 총독 우가키를 만나 담판을 짓기로 했다. 광주 봉선리 마을에 있는 선발된 나환자 150명도 광주를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 서울을 향해서 전진하는 나환자들의 생활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도보로 서울까지 가는 도중에 지방 주민들의 습격을 수차례 받았다. 이 소문이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자 서울에 도착할 무렵에는 40여 명이나 됐다.

이들의 항의에 놀란 우가키 총독도 할 수 없이 손을 들고 광주 봉선리 마을에 새로운 나환자 시설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광주 시민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게 했다. 이 일로 광주 시내에 있던 모든 나환자들이 봉선리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모여들게 됐다.

최흥종 목사는 이 일에 성공하자 다시 윌슨 선교사와 타마자 선교사와 의논해 여천군 율촌으로 나환자 시설을 이전하기로 하고 전남도청의 적극적인 지원과 광주시민들의 협력으로 교회, 병원, 숙소를 신축하고 나환자 600여 명을 옮겨 나환자 천국을 건설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이때 광주시민들은 그들의 떠남을 기뻐했지만 이들을 맞이하는 여천군 군민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순천 지방 선교부와 전남도청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여천 애양원은 자리를 잡게 됐으며, 윌슨 선교사는 애양원 원장으로, 타마자 선교사는 애양원 교회 담임목사로, 최흥종 목사는 애양원과 애양원교회, 그리고 소록도 나환자촌을 드나들면서 사역에 임했다.

그러나 일제의 손길이 그에게 뻗치기 시작했다. 나환자를 돕는 최흥종에게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여보세요. 나환자를 돕는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라니 이제 일본도 망해가는 것 아닙니까?”

“아니, 최흥종 목사, 무스기 소리를 그렇게 합네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일생을 나환자에게만 절하기로 하고 살았으니까 그렇게 알고 돌아가세요.”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광주에 있는 모든 목사들을 광주신사로 끌고 가 신사참배를 시켰으며 광주 시내의 교회를 통폐합시켰다. 이러한 사정을 멀리서 살펴봤던 최흥종 목사는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손수레 하나에 살림을 싣고 등심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자연을 벗 삼아 매일같이 성경 읽는 일과 기도로 일관했으며, 그와는 절친하게 협력을 이뤘던 윌슨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했다.

윌슨 선교사가 애양원 나환자들과 헤어질 때 걷지도 못하는 신체장애자 나환자들은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 그에게 외쳤다.

“선교사님, 살아서 돌아오셔야 합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도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봤던 최흥종 목사는 윌슨 선교사와 애양원 나환자를 위해 더 많이 기도했다. 더구나 애양원교회에서 목회하던 손양원 전도사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를 거쳐서 청주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후 애양원교회와 애양원 나환자들은 그동안 타마자 선교사가 설립 운영했던 애양원 한성성서학원 출신들이 도왔다.

최흥종 목사는 눈만 뜨면 성경 읽는 일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맺는 것이 일과였다. 자연히 그의 영감은 밝아졌고 욕심과 정욕은 점점 사라지고 다가올 세상에서 나환자를 어떻게 모아 이상촌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으며, 일본은 망한다는 확신으로 살았다.

나환자의 이웃 윌슨 선교사

애양원을 떠나 광주에 도착한 윌슨 선교사는 양림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저택에서 몇 날을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을 누가 돌볼 것인가.’

참으로 암담했다.

“여보세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

또 고등계 형사들이 몰려오고 있구나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미국인 크리스천답게 살자 하면서 현관으로 갔다.

“어서 오십시오. 참으로 반갑습니다.”

이 말에 어리둥절해진 고등계 형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당황해 했다.

“선교사님, 언제 출국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곧 준비가 되는 대로 출국할 예정입니다.”

이 일본인 고등계 형사는 윌슨 선교사 주택을 적산이라는 이름으로 압수해서 자신의 상사에게 상납하려는 계획을 갖고 윌슨 선교사의 집을 드나드면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윌슨 선교사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떠나면서 타마자 선교사에게 두툼한 열쇠를 맡기고 떠났다. 그 다음 날 고등계 형사가 왔지만 이미 문마다 철저하게 잠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옆집에 살고 있는 타마자 선교사에게 달려갔다.

“그 집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에 질린 고등계 형사는 타마자 선교사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 집은 내 마음대로 못 합니다. 재단이사회가 구성됐는데 이사회를 열어 보아야 합니다.”

“언제 재단이사회가 모일 수 있습니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절반 이상이 미국으로 귀국해 버렸기 때문에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할 수 없이 고등계 형사는 물러가고 열쇠 대신 타마자 선교사를 체포해 갔다. 그토록 윌슨 선교사의 집을 탐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윌슨 선교사의 집은 지금도 광주 양림동 동산 안에 전남노회 유지재단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으며, 광주지방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비록 윌슨 선교사는 광주를 떠났지만 그의 숨결이 지금도 애양원과 광주에 남아 있으며 아직도 그의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윌슨 선교사는 미국 콜럼버스에서 출생했으며, 1905년 워싱턴 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면서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를 졸업하고 1908년 광주선교부에 도착해 광주의료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광주 시민은 물론 인근 지역에 있는 모든 환자를 진료하며 생활했다.

그는 이미 광주에서 복음 선교에 임하고 있던 녹스(Miss B. L. Knox, 1881~1962) 선교사를 만나 1909년 10월 12일 서울에서 결혼예식을 올리고 같이 사역에 임했다. 부인 녹스 선교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출생했으며, 퀸스 대학을 졸업하고 1907년 목포선교부에서 사역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