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미래를 꿈꾼 지도자, 이상재
옥중에서 ‘성경’ 만나고 독립협회·YMCA로 국민 계몽·자주권 수호에 앞장선 생애
이상재 <1>

서울 YMCA에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초기부터 활동의 중심에 있었고, 일제의 박해 앞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저항과 계몽에 앞장섰던 이상재에 관해서 알아보는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미래를 제시하고, 그 길을 열어가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다. 이상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가 개종을 하게 되는 시점은 조선이 일본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어가는 시기와 같다. 그의 개종은 단순한 종교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의 강제해산과 함께 수구파에 의해서 투옥된 선생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된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만남, 특별히 그 과정에서 이승만이 전해준 성경을 접하게 되었다. 성경을 통해서 복음을 깨닫게 되어 옥중에서 개종을 했다. 그와 함께 투옥되었던 사람들은 독립협회를 결성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성경을 탐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주일이면 선교사들이 감옥에 찾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함께하면서 기독교를 통한 조선의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가 개종할 때 나이가 당시로서는 노인이라고 할 수 있는 55세였다. 평생을 유교의 선비로 공부하다가 부패한 관료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것 자체가 부정한 방법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시험에 고배를 마시고 고향에 칩거하고 있었던 그에게 관리로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그의 나이 45세가 되어서였다. 1884년 우정국이 처음 설치되면서 총판에 홍영식이 됐고, 홍영식의 추천으로 우정국의 주사가 된 것이 그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해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총판인 홍영식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참살을 당하게 되자 사직을 하고 다시 낙향해야 했다. 낙향해 있는 동안 그는 조선의 미래가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87년 그에게 다시 전갈이 왔다.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하는 박정양이 그를 추천해 1등 서기관으로 동행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총명하고 절개 있는 판단력은 박정양의 공사로서의 역할을 돕기에 충분했다. 그의 일행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청나라의 대사였다. 청나라가 조선의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조선은 독자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논리로 박정양의 국서(國書)를 대신 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이상재는 정면으로 반박하고, 청나라 대사의 논리에 대항해서 조선의 자주권을 주장하면서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함으로써 주권국 조선의 독립적인 외교를 열어갔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그가 평소에 갖고 있던 의식과 명철함, 그리고 재치가 넘치는 입담이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랜 동안 그 안에 준비됐던 것이다.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에 이어서 주미공사의 서기관으로 미국을 경험한 그는 조선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귀국한 후 그가 선택한 것은 조선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직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 자신이 무지한 국민을 계몽하는 일에 직접 나서야 했다. 국민이 무지하고, 세상에 눈이 어두운 상황에서 미래를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그는 국민을 깨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일에 앞장섰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에게 다가온 것이 독립협회였다. 크리스천들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는 단순한 신앙운동이나 전도단체가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 이상재가 추구하는 국민계몽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단체의 명칭에 나타나듯이 ‘독립’이라는 말은 아직 일본에 의한 식민지가 아님에도 이러한 명칭을 사용한 것은 여러 가지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이 협회는 이상재를 부회장으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독립문을 건축하고 독립관을 개관해 조선이 자주권을 갖고 있는 국가임을 천명했다. 이는 조선이 사실상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독립협회를 결성했던 지도자들의 선견적 판단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것과 함께 각종 강연회를 열어서 국민적 계몽을 주도하는 일에 앞장섰다.
독립협회는 정치기구로 <만민공동회>를 만들어서 당시 조선정부가 친러정책과 비자주적인 외교정책을 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정세에 무감각하고 무지했던 사람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과 함께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그 방향도 제시를 했다. <만민공동회>가 주최하는 강연회는 자주외교와 국정개혁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강연회는 당시 조선은 한 사람의 통치자가 전권을 갖고 통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군주인 임금에 대한 도전이고, 배신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독립협회는 수구세력들에 의해서 해산되었고, 협회를 주도했던 16명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투옥을 당했고 몇 명은 망명을 해야 했다. 그 가운데 이상재도 당연히 있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