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부흥집회 하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세 차례 가서 목사님들을 만나고 계획을 세워야 하니 경비도 들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아침 10시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면 오후 3시가 넘었다.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회의하고, 집회 일자를 확정한 뒤 밤 11시 기차를 타고 상경하게 된다. 서울역에 도착하면 새벽 6시, 같이 갔던 자매들을 집에 보내고 나는 사무실에 와서 자지 않고 세면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같이 갔던 자매들도 오전만 쉬게 하고 오후 1시만 되면 반드시 사무실에 나오도록 했다. 그리고 자매들은 어리기 때문에 침대 칸에서 자도록 하고 나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 삼등 칸을 이용했다. 이렇게 하기를 20년, 개미같이 모아 개안 수술 기금, 장학 기금, 선교 기금, 시각장애인교회 협력 기금 등을 조성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면서 어린 자매들에게 너무나 많은 일을 강행시켰던 것이 아닌가 싶어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초창기에 수고한 자매들은 현재 목사 사모, 사업가의 아내, 가정주부로서 자녀들을 거느린 훌륭한 어머니들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자주 왕래하고 지난날의 일들을 회고하면서 함께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우정과 사랑은 참으로 진하고 값진 것이다.
실로암 안과병원에는 노래하는 천사들이 있다. 나는 음악을 참 사랑하고 좋아한다. 실로암 안과병원에서는 날마다 아침 8시부터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중에 몇 분간은 찬양을 가르치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나와서 찬양하는 순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찬양하다 보니 간호사와 행정직 직원 중에 아름다운 목소리와 음악에 소질 있는 자매를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몇몇 자매들을 선별해 중창단을 구성하기로 하고 그 이름을 ‘엔젤스 보이스’라 했다. 예배 시간에 참석한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해 희망과 용기를 줌으로써 찬양을 통한 선교와 치료를 하게 되었다.
매일 점심 시간을 이용해 30분씩 연습했다. 그 후 몇몇 교회를 순회하면서 찬양으로 성도들에게 은혜도 끼쳤고, 지휘자들에게 무척 잘한다는 평가와 칭찬도 받았다. 그들은 비록 음악 전문가는 아니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더 많은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나고야, 동경 그리고 미국 대도시의 한인교회와 교민들 등 고국을 그리워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 찬양과 간증, 가곡, 동요, 민요를 선사했다. ‘아리랑’ ‘도라지’ ‘노들 강변’ ‘고향의 봄’ 이런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 교민들은 이북에 두고 온 가족과 한국에 남아 있는 친척들, 흙 냄새 나는 농촌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목사님들과 여러 성도들이 모든 정성을 기울여 우리를 맞아 주었고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엔젤스 보이스, 노래하는 천사들은 실로암 안과병원을 국내외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공헌한 바가 참으로 컸다.
언제나 빈손으로 떠나지만…
그 동안 나는 홀로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지를 선교 목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갈 때마다 여비가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빈 주머니와 빈손으로 갈 때마다 막막했지만, 한 줄기의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목적지를 향해 갔다.
어떤 때는 2개월, 3개월, 또 어떤 때는 6개월 이상을 머무르기도 했다. 오랜 시일 동안 외국에 머문다는 것은 호텔비, 식비 등 엄청난 거금이 들어가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 재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우리 같은 서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만 믿고 친구들의 따뜻한 사랑을 바라면서 떠나곤 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