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머무는 사적 개념이 아니라 나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 전체를 포괄하는 공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소명이다.”
(Max L. Stackhouse, 「Public Theology and Political Economy」중 일부)
한국교회는 복음이 전해진 지난 140년 동안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우리 사회의 변혁과 발전을 이끌어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회 속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질문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의 공적 책임이 약화되고 세속적 가치가 신앙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것인지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려운 시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가 주변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세속적 가치가 신앙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포스트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넘어, 복음의 방식으로 세상 속에 존재하고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크리스텐덤과 한국교회
크리스텐덤(Christendom)은 ‘그리스도(Christ)’와 ‘지배 및 영역’을 뜻하는 접미사 ‘-dom’이 결합된 말로,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사회 전반을 주도하던 시대를 가리키며, 4세기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정치∙문화∙교육∙윤리의 기준이 되었고, 중세 유럽의 천 년은 ‘기독교 문명의 시대’, 곧 크리스텐덤의 시기로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에도 서구와 같은 크리스텐덤의 시기가 있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한국에는 서구 유럽처럼 국가 권력과 교회가 제도적으로 결합했던 시기는 없었습니다. 물론 복음이 전해진 이후 교회를 통해 근대 교육과 의료가 시작되었고, 기독교학교들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끌 인재를 길러낸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1990~2000년대 교회의 폭발적 성장 속에서 교회가 문화를 선도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 ‘크리스텐덤’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역사신학자 장동민 교수(백석대학교)는 이를 ‘유사(類似) 크리스텐덤 시대’라 명명하며, 제도적 결합은 없었지만 사회 전반에 교회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의 도래
오늘날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교회가 쇠락해 예배당이 술집이나 갤러리로 바뀌었고, 기독교 대학에서조차 무신론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음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교회의 신뢰도는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기독교학교들은 건학이념을 지키기 어렵고, 성도들이 떠난 예배당이 상업시설로 매매되는 현실도 보도되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대하며 사회 속 기독교 혐오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이미 포스트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줍니다. 과거 교회가 윤리와 가치의 기준이 되었던 것과 달리 오늘날 교회의 권위는 도전을 받고 신앙은 점점 개인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고난 받으신 어린양의 신학
이 시대에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관을 쓴 사자의 힘과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이 아니라 고난받은 어린양을 따르는 겸손의 신학입니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에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은 강력한 통치를 상징하는 사자의 권세(요한계시록 13:2)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보여주신 삶, 곧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며(신명기 10:18; 야고보서 1:27), 병든 자를 고치시고(마태복음 9:35),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신 어린양의 모습(마가복음 10:45; 빌립보서 2:8)에 있습니다.
강자 친화적 제국이었던 로마가 감당하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는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뛰놀고(이사야 11:6), 억압 속에서 흘리던 눈물이 닦이는 세상이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4).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는 어린 양이 강해져 사자가 되는 나라가 아니라 사자가 스스로 낮아져 어린 양과 함께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9-10). 그것은 강자 친화적 세상이 아닌 약자 친화적 세상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져 오신 겸손의 왕국입니다(요한복음 1:14; 빌립보서 2:6-7).
우리는 시대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신앙과 삶을 요구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랜 세월 핍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권세와 권력의 달콤함 앞에서 흔들렸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도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우리 안에 스며든 권력과 화려함의 유혹일지 모릅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낮아지고, 약자와 함께하며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며, 새 시대에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반드시 새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함승수 교수
<명지대학교, 사학법인미션네트워크 사무총장, 동안교회 협동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