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시인?
내 인격, 시인으로서의 전인적(全人的)인격은 어떤 것일까. 내 인간적 됨됨이를 형성해 온 것은 가정환경과 시대적 특수성에 의해서이다. 모태신앙에서 스스로 거듭나 자신의 신앙으로 헐벗음이 없었던 세월이 지속되는 동안 나의 신앙생활이란 참된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종교의식이 시대상과 맞물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심이 항상 잠재되어 온 것이다. 조국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향에서 축출돼 월남했다. 또 6.25남침으로 피난, 중공군의 참전으로 또 다시 피난(1.4후퇴)을 떠나야 했던 민족의 비극을 직접 체험한 바 있다. 아직 자기 정체성을 의식하지 못했던 한 소년이 직접 체험한 불안과 공포심에서 오는 갈등을 견녀내기 힘든 일이었다. 이처럼 내가 처한 시대의 질곡을 견뎌오는 동안 나는 실존주의 사상가들이 말하는 불안의 개념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카뮤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백사장에서 순간적으로 한 여인을 살해하고 법정에 서서 판사가 “왜 죽였느냐?”고 묻자 “햇빛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결국 뫼르소는 자기가 왜 살인했는지를 자기도 모른다는 실토가 아닌가. 이는 정신분석적인 해석보다는 외톨박이로 세상과 별로 소통없이 무질서한 삶속에 쌓인 갈등이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나 개인적인 내적 딜레마와 국가, 사회적 부조리한 현상이 겹쳐 쌓인 것이 나의 불안, 공포 등이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나의 종교적 현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것은 문단의 시인, 평론가들의 작품평을 통해서이다. 이들이 내 시작품들을 읽고 박이도의 시에선 기독교 특유의 작풍(作風)이 풍긴다는 것이었다. 나는 시를 쓰면서 내가 믿는 기독교를 의식하면서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는가 보다’라고 스스로의 시적 성향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의 시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정신의 고향이 기독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왜 한국적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그는 기독교적 교육을 통해 다만 밝고 맑은 것을 동경하는 것을 배운다.(김 현 <현대시학> 1969년 12월호)
그의 시는 한결같이 인간과 삶의 원형에 가까운 언어적 형상이다… 이 정결하고도 고독한 구도적 자아를 통해서 무변의 상상력, 곧 자연과 인간, 신성과 인간이 삶의 가없는 경계에서 만난 문학적 승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유성호 <빛과 그늘> 시집)
… 그러한 종교적 정신에 뿌리를 둔 순수의지와 청교도적인 결벽성으로… 기독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의 지편을 넓혀왔다.(특집 선정위원 <한국시학> 2013년 봄호)
중국의 정치가 손문(孫文)이 당대의 혁명운동가였던 송교인(宋敎仁)의 무덤에 세운 비석에 새겨넣은 비문(碑文)이다.
直筆也人誅(옳은 글을 쓰면 권력이 벌을 주고)
曲筆也天誅(거짓을 쓰면 역사가 벌을 주나니)
勒在片石(한조각 돌에 새기어)
俟後史家(역사의 심판을 기다리겠노라)
송교인은 중국 신해혁명 때 원세개에 의해 암살당한 혁명가였다. 그의 비문에 손문이 위와 같은 비문을 써 주었다. 이 비문을 읽으면 100년이 지나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임종의 문턱에서 나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언어(긍정)와 죽음의 언어(부정)가 서로 대립해 싸우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호모 로쿠엔스의 사유체계가 다양하게 파생하게 된 것은 바벨탑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