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기미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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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기미년 삼월일일 정오/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이날은 우리의 의요/생명이며 교훈이다/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1893-1950)가 작사하고 박태현(1907-1993)이 작곡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후 1949년 공모를 거쳐 1950년 3.1절 기념 노래로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②현대어로 고쳐 쓴 독립 선언서 앞부분을 읽어보자.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기대서 이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 이를 널리 밝히며, 민족의 오래도록 변함없을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에 따른 세계 개조의 기회에 따라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가 함께 생존하고, 같이 살아나갈 권리의 정당한 움직임이니 하늘 아래 어떠한 것이든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비롯하여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몇천 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겪은 지 지금까지 10년이 지났으니 우리 생존권을 빼앗긴 것이 무릇 몇이며, 정신적 발전에 장애가 됨이 무릇 몇이며, 민족적 존엄에 훼손된 것이 무릇 몇이며, 새로움과 독창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흐름에 기여하고 도움을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무릇 몇인가? ③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파고다 공원에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있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 선언식을 연다기에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각 민족대표들은 인근 태화관에 있었다. 전날 밤 폭동의 우려가 있다며 장소를 파고다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급히 바꿨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인사가 끝난 뒤 민족대표들은 함께 만세삼창을 외치고 나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독립 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했다. 한용운의 공약 3장은 선언서 끝에 추가되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①오늘 우리의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그에 벗어난 행동을 하지 말라. ②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히 발표하라. ③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떳떳하고 정당하게 해라(조선을 세운 지 4252년이 되는 해 3월 초하루/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나인협, 양순백, 양한묵, 유여대, 이강섭/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한용운, 홍병기/60대(2명), 50대(15명), 40대(11명), 30대(5명). 한편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따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지로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수십만 명의 만세 시위가 해질 때까지 계속됐으나 단 한 건의 폭력 사건도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평화적이었다. 이어서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신청, 원산 등지에서도 동시에 독립을 위한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특별히 천도교, 기독교, 불교 3대 종교 단체가 일심동체가 되어 진행한 것이 특이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의 주체로서 일본에 대한 독립 청원도 병행했다. 그들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원칙을 지켰다. 만세 시위는 온 나라로 확산되어 그해 5월까지 계속되었다. 집회 수는 1천542회, 참가 연인원은 202만3천89명이었고 이 시위로 인해 7천509명이 사망했고, 1만5천961명이 부상당했다. 일본 경찰에 피검된 사람이 5만2천770명이었고 불탄 교회당이 47개요, 불탄 학교가 2개교요, 불탄 민가(民家)도 715호였다(日本 측 발표). 3.1운동은 해외로까지 번져서 만주 연해주와 멀리 미국에서도 만세 시위가 있었다(북간도/3.13 용정독립선언/서간도 3.12 류허현 싼위안푸 독립선언/연해주 3.17 대한국민 의회주의 독립선언/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서는 모금 활동을 벌여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고,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선전 활동을 지원했다). 3.1운동은 중국, 아시아, 중동 등 다른 피압박 민족들에게도 저항 운동의 길잡이가 돼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사티아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튀르키예의 민족운동을 촉진시켰다.

김형태 박사

<더드림교회•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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