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교육 사역으로 시작된 여성교육의 역사
정신여학교 址 ② (연지동)
루이스 세브란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정신여학교의 역사를 먼저 정리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정신여학교의 시작은 연지동이 아니라 정동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무대가 정동이기 때문인데, 그곳에 자리를 잡은 선교사들은 입국조건에 선교가 아닌 교육과 의료사업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입국해서 정동에 터를 잡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그 아이들을 선교사의 집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거리의 아이들을 단지 먹이고 재우는 것이 전부일 수 없기에 그들을 가르쳐서 사회인으로 길러야 하는 필요를 외면할 수 없기에 시작된 것이 초기 교육 사업이었다.
그중에도 여자 아이들은 더 소외된 상태였다. 사회적인 상황이 여자 아이들이 더 차별을 받고 있는 터라 선교사들 부인이나 여자 선교사들은 소외된 채 체념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여자 아이들을 못 본 체 할 수 없었다. 정신여학교는 북장로교 선교부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자리하고 있던 정동에서 시작되었다. 1887년 6월 여자 의사로서 북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엘러스(A. J. Ellers)가 중심이 되어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를 시작한 곳은 알렌이 살고 있었던 집인데 언더우드의 집 뒤편에 있었다. 알렌은 당시 제중원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살고 있던 집을 제중원 사택이라고 불렀다. 그 후 알렌의 집은 덕수궁의 확장과 함께 헐리게 되고 그 자리에 현재 남아있는 중명전을 지었다. 그 과정에서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정동시대를 접고 종로시대(연지동)를 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정신여학교도 정동에서 연지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정동여학당(貞洞女學堂)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엘러스가 학당장으로 취임을 해 처음에는 성경과 산술 두 과목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5살 여자 아이 1명을 가르치기 시작해 차츰 학동들이 늘어서 초기 5년 동안 52명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생활에 필요한 산술과 신앙생활의 근본인 성경을 중심으로 가르치면서 생활예절이 몸에 배이도록 하루에도 10여 차례씩 인사하는 것을 생활규범으로 정해서 훈련시켰다. 당시 사회가 유교적인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의 생활예절에 대해서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덕수궁을 확장하면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수용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895년 정동을 떠나 종로의 연지동으로 선교부가 옮기게 되면서 정신여학교도 옮기게 되었다. 연지동으로 옮기면서 사립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로 교명을 바꾸었다. 연지동 시대를 열면서 첫 수업을 같은 해 10월 20일에 시작함으로써 이 학교의 개교기념일로 정했다. 이때 학생은 불과 전교생이 10명이었다. 당시에 여자 아이들이 공부하기 위해서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연지동 시대를 열면서 차츰 정규학교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차츰 과목도 늘어났다. 성경과 산술, 예절 과목에 그치지 않고 한문, 역사, 지리, 도화, 습자, 체조, 음악, 가사, 침공, 위생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수업연한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치게 하고, 이어서 중등과정에 해당하는 교육을 연장시켜서 가르친 다음 졸업을 시켰다. 당시 일정한 법률이나 제도가 정비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결정에 따라서 수업을 했고,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졸업시키는 정도였다.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채플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연동교회에서 전교생이 매일 예배드리는 것이었는데 신앙 교육을 위해서 그만한 기회가 없었다. 주일이면 전교생이 합동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쓰개치마를 쓰고 구리개교회(제중원이 있었던)까지 걸어가는 모습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제도를 정비하면서 1907년에 정식으로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1909년에 이르러서 정신여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조선이 무너지면서 식민지 시대로 가는 과정이라 혼란스러웠지만 교육을 통한 선교가 절실했기에 인가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식민지가 시작된 후 1912년 사범과와 보수과를 설치 운영하면서 지도자 양성을 시도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나 3년 후에 이 과정을 폐지했다.
정신여학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맞물려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식민지 직후인 1911년에는 식민지 정책에 따른 학제개정을 했지만 정신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해주지 않고 탄압을 함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실시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동문들이 중심이 돼서 구명운동 등 다양한 의사개진을 통해서 1928년에서야 겨우 지정학교 인정을 받아 선교부가 직접 운영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들은 식민지 정책에 따른 다양한 박해와 불이익을 받았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