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수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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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이라는, 흔히 쓰이는 신조어가 있다. ‘소소 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의 줄임말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소확행과 그것의 원천이 있을 것이다. 대단한 행복은 아니라도 기쁨을 주는 것들, 가령 그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일 수도 있고, 반려동물 이나 식물을 기르는 것일 수도 있으며, 남들이 보기엔 아주 하찮아 보이는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확실히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소확행 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 현상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 커다란 행복을 누리기 취약한 시대라는 반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누리기 나름이지만, 우선 기본적 인 욕구가 충족돼야 좀 더 큰 행복을 꿈꿀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사회의 불평등이 노골적으로 난무하는 이 시대에, 그저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되고 있으므로 만족해 버리는 것은 불평등에 힘을 더 보태는 행위일 수 있을뿐더러, 욕심에 끝이 없는 인간은 쉽게 그럴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위협받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선 대표적인 것이 고용불안이다. 취업 자체가 힘들다보니 더 큰 꿈을 꾼다는 것은 요원 한 일이다. 고용문제부터 이렇다보니, 내 집 한 채를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일생을 저당잡혀 노동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당장 집세를 내는 데 전전긍긍하는 마당에 행복이라는 말은 사치일 뿐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 중에 하나가 ‘욜로(YOLO)’다. ‘You Only Live Once(인생은 한번뿐이다)’의 줄임말이다. 이들은 기약 없는 미래에 투자하지 않으며, 현재에 충실한다. 저축을 하기보다는 여행을 떠나며, 말 그대로 자신의 행복에 거침없이 투자한다. 이런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많지만, 마냥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사회가 바로 그 주범이기 때문이다. 욜로가 못되는 소시민들은 바로 여기서 소확행을 실행한다. 사회로부터 무수한 낭패감을 맛본 사람들은 소소한 것에서라도 확실한 성취감을 느끼려고 한다. 그러나 과연 모두가 소확행을 누릴 수는 있는 걸까. 분명 모두에게는 소소한 행복, 아니 행복이라 부르기는 애매해도 기쁨 정도는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소소한 행복일 수는 있겠으나, 과연 확실한 행복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쯤 되면 행복을 누리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과연 행복이 있을까. 이런 인생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생각을 뒤 집어본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으므로. 기쁨과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서로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둘이 서로 옷을 바꿔 입기도 한다. 절망적인 상황 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더 큰 행복이 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기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너무 기뻐할 필요도, 슬픈 일이 있어도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고 봐야 그 의미를 알 수가 있다. 세계는 이토록, 지금으로선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는 것이다. 살아볼 만한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어떤 글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대단히 진지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며 어찌 보면 우스갯 소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척 재치 있는 통찰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뉘앙스의 글이었다. 20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10대 때가 좋았지. 30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20대 때가 좋았지. 40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30대 때가 좋았지. 50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40대 때가 좋았지. 60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50대 때가 좋았지. 감이 오는가? 우리의 인생은 늘 좋았던 거다. 우리는 지금, 지금으로서는 알아볼 길 없는 행복에 휩싸여 있는지도 모른다.
(2020년 1월 월간 한국수필(통권299호)에 신인상 당선작으로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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