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통곡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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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유대인 구역에 있는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공동성지로서 B.C. 10세기에 건축된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후 B.C. 6세기에 스룹바벨이 재건하고 B.C 1세기에 헤롯이 다시 증축했다가 A.D 70년 티투스의 로마군에 의해 파괴될 때 유일하게 남겨진 서벽이다. 이 벽 너머에는 이슬람 최대 성지이자 무함마드(570-632)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알마크사 모스크’(가장 먼 모스크)가 있어 이슬람 신자들은 이 벽을 ‘알 부라크 벽’이라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이 분할되면서 통곡의 벽은 요르단에 넘어갔다가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과 옛 시가지를 점령한 후에 다시 통합시켰다.

B.C 10세기에 ‘지혜의 왕’으로 알려진 솔로몬(B.C970-930 재위)이 여호와께 봉헌한 성전은 7년 공사로 완성했다. 하지만 이 성전은 B.C 58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B.C634-562) 왕의 침공으로 파괴됐고 유대인 상당수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후에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샤의 고레스(키루스 2세/B.C585-529)왕이 관용정책을 시행해 유대인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고레스 왕이 임명한 유대지역 총독이 스룹바벨이었다. 유대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B.C.519년에 성전을 재건했는데 이때 다리오(다리우스Ⅰ세/B.C 550-486)의 지원과 스룹바벨의 주도로 성사된 것이다. 그 후 로마의 지원으로 헤롯(B.C.73-A.D.4)이 왕으로 즉위했는데 헤롯은 B.C 20년경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성전을 증축했다. 그러나 이 헤롯성전은 100년도 안 돼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과도한 세금 부과와 유대교에 대한 간섭 때문에 1차 유대 전쟁(A.D.66-73)이 벌어졌다. 66년 로마에서 임명한 유대 총독인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유대인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진 금고와 보물까지 착복하자 유대인들이 분노했다. 여기에 게시우스가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결국 폭동으로 확대되었다. 이 저항이 타지역으로 번져가자 시리아 지방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3만 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직접 군사작전을 벌였지만, 반란군의 기습으로 6000명이 죽고 나머지는 도주하면서 궤멸당했다. 이에 네로 황제는 갈루스의 패배가 다른 지역으로 번져갈 것을 우려해 그리스에 머물고 있던 베스타스아누스 장군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A.D 67년 티투스는 아버지인 베스파스아누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암반 위에 세워졌고 3중 성벽으로 둘러쌓인 천연요새지만 70년 6~9월까지 포위해서 결국 함락시켰다. 점령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었고 서쪽 담장 하나만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예루살렘 함락 후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했다. 다만 1년에 한 번 성전파괴일인 아빕월 9일(양력 7~8월)에만 통곡의 벽에 접근을 허락했다. 이후 15세기에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 튀르크의 시대가 열리면서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받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말기에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에 들어가면서 수도가 되었다. 시오니즘 운동으로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유대인과 이슬람 공동체 사이에 갈등근원지가 되었다. 1929년에는 폭동이 일어나 133명의 유대인이 죽고 339명이 부상 당하기도 했다. 1948.5. 아랍-이스라엘 전쟁(1948-1949)이 일어나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점령했다가 1967.6.5.-10간 ‘6일 전쟁’으로 다시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통곡의 벽은 488m의 서벽의 일부로 길이 50m, 높이 19m이며 45개의 층으로 구성돼 있다(지상 28개, 지하 17개 층).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 벽에 가서 기도하도록 되어있다.

김형태 박사

<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더드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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